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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uda Oct 30. 2020

옥상에 심어 방금 따 온 회 한 접시

엄마가 하고 다니던 쪽머리처럼 단정한 글씨로 가득 찼던 다시는 볼 수 없는 엄마의 일기장

엄마, 엄마가 나에게 일기장 얘기하던 날 생각나?
내가 엄마에게 엄마 죽으면 내가 가질 거라고 했던 그 일기장 말이야. 어릴 때 아버지가 여자라고 하도 공부를 못하게 해서 나는 뭐든 책이라고 생긴 건 눈에 불을 켜고 봤었어.

그래서 보게 된 거지.
엄마가 하고 다니던 쪽머리처럼 단정한 글씨로 가득 채워져 있던 엄마의 일기장을.
엄마 시집올 때부터 시작해서 다달이 챙겨야 할 집안 대소사들은 물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들어있는 엄마의 일기장은 내게 그 어떤 소설책 보다 재미있었어. 내가 시집오기 전까지 거의 반닫이로 하나였으니까 그 이후로도 엄마가 계속 썼으면 또 반닫이 하나가 되고도 남았겠지.
엄마의 일기장은 엄마만이 아니라 나의 역사이기도 했고 어쩌면 시대의 역사이기도 했어.

그런 일기장이었는데 그걸 다 태워 없애다니.
내가 옆에 있었음 분명 말렸을 테니까 우리 집 오시기 전에 엄마가 손수 다 없애고 오신 거였어.
그때 엄마가 그랬어.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긴데 이런 거 남겨놓고 가는 거 아니다."


그런가. 그래도 남겨진 사람에겐 그게 추억거린데.

그 일기장이라도 있음 문득문득 엄마 생각날 때 소주 한잔에 안주 삼아 읽으며 그리움 달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 나서 엄마가 엄마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보면서 말씀하셨어.

"나 죽으면 이거 니가 도로 가지고 가. 니가 준 거니까 살아있는 동안은 내가 잘 낄게. 이거 니 시어머니 꺼라며."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이것저것 쓰시던 물건을 정리하는데 내가 우리 시어머니께 해드린 것이 참 많더라고. 그런데 우리 엄마에게는 반지 하나 해드린 게 없었어. 시어머니께는 반지며, 팔찌며, 목걸이며 안 해드린 게 없는데. 보석함을 열어보니 내가 해드렸던 시어머니 스부 다이아 반지가 보였어. 순간 그냥 들고 엄마에게 간 거야. 내가 시어머니 해드린 건데 이제 엄마 가지라고 하면서.
그때 엄마 마음이 어땠을까?
왜 난 엄마 반지 하나 새로 사 드릴 생각을 못했을까?

그래도 엄마는 그 반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끼고 계셨지.

딸이 해 준 반지라면서.


부모에겐 자식이 건네 주는 모든 것이 선물이다


며칠 전에 성 서방이 회 먹고 싶지 않냐며 양평에 가자고 하더라고.
푸짐하게 올라온 회를 보니 엄마 생각나더라.
엄마 날 거 참 좋아하셨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긴, 엄마가 엄마 드시겠다고 음식 한 번 한 적 없고, 엄마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엄마 입으로 말씀하신 적 없는데, 엄마가 궁금할 수도 있겠네.
엄마, 엄마가 회 좋아하는 거 나 엄마 일기장 보고 알았어.
거기에 다 있더라고. 엄마가 좋아하던 것들 모두.

완전 귀하게 자란 부잣집 고명딸이어서
시집오기 전까지 못 해본 거 없이 다 해 보고, 안 먹어 본 음식이 거의 없었던 우리 엄마.
호기심 많고 관찰력이 뛰어나서 한번 본 것은 남들 열 번 해 본 것보다 잘했던 우리 엄마.
특히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우리 엄마.
그 바느질 솜씨로 시집와서 집안 일으켜 세우고 동네 일 다 도와준 우리 엄마.
어릴 때 독선생 모시고 공부한 실력으로 6.25 전쟁 후 동네 사람들 모아 야학까지 하신 우리 엄마.

엄마,
그 일기장 속의 엄마를 보며 나도 모르게 엄마를 닮아가고 있던 거였어. 내가.

집에 포수까지 있어서 어릴 때부터 싱싱한 육회에 짐승 피까지도 드셨다니 엄마가 날 음식을 좋아하시는 건 너무도 당연한 거였어.
그렇게 귀하게 자란 딸이었는데 장마에 집이고 뭐고 다 떠내려가 망한 줄도 모르고, 옛날 잘 살던 양반이라는 가문만 보고 딸을 시집보내셨던 외할아버지 마음은 또 어떠셨을까?
시집와서 당신 해가지고 온 혼수 팔아 살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며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음식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엄마는 그렇게 좋아한던 날 음식 하나 못 먹고 어떻게 참고 사셨을까?


옥상에 심어 방금 따 온 회 한접시


엄마 우리 집에 한 달 와 계실 때 문득 생각이 났어.
'우리 엄마 회 좋아하시는데..'
마침 아는 사람이 횟집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생선회 한 접시를 시켜다 드렸지.
고추장 찍어서 입에 넣어 드렸더니 참 잘 잡숫더라고.
그러면서 엄마가 나를 보고 그러시는 거야.


"참, 맛있수. 이것도 옥상에다 심으셨수?"


처음엔 나에게 공대를 하기에 엄마가 나를 몰라보는 줄 알고 내가 누구냐고 물었잖아. 엄마 기억나? 사실 자식 큰 다음에 엄마는 자식에게도 해라를 안 하셨으니까 나에게 반공대 하는 엄마가 이상한 건 아니었어.

그런데 옥상에 심었다니.. 눈이 잘 안보이시니까 음식을 맛으로 아시는데 회 맛을 기억 못 하시는 거야. 하도 오래 드시지 않아서.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모르니까 누구도 사드리질 않아서 그 좋아하던 날 것의 맛을 잃어버리신 거지.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

라는 말을 속으로 얼마를 삼키면서
초고추장에 회를 찍어 엄마 입에 넣어 드렸어. 그렇게 엄마는 옥상에 심어 방금 따 가지고 온 회 한 접시를 다 드셨어.
딸 평생 미안할 것 아시고 내 미안한 마음까지 거둬가려고 내 곁에 한 달 머물러 준 엄마.

그래서 더 미안해.

맨몸으로 가기도 어려워 이승에서 며칠씩 곡기 끊고 가야 하는 저승길에 딸내미 미안한 마음까지 얹어 가지고 갔을 테니까.

엄마, 엄마가 그랬어.
너도 내 나이 돼보라고. 그럼 그때 알 거라고.
그래. 엄마, 진짜 그렇더라고. 엄마 나이가 돼 보니까 옛날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
나를 보면 그 속에 엄마가 있고 내 딸들을 보면 그 속에도 내가 있어.
나도 내 속에 있는 엄마처럼 내 딸들 마음속에 좋은 엄마로 남을 수 있을까.
엄마, 다시 생각해보니, 엄마가 쓴 일기장 엄마가 다 없애고 간 거 잘 한 일인 것 같아. 자기 역사는 자기가 쓰고 자기가 거두는 거지 남겨 두는 게 아닌 것 같아. 누구나 자기 살아온 인생 책으로 쓰면 책 열 권은 나온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그 역사 태워보면 한 줌 재밖에 안되더라고.
이렇게 엄마에게 편지로나마 가슴에만 담았던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 찬 물 한 그릇 마신 기분이야.
엄마, 고마워.
엄마가 썼던 일기가 나를 키웠어.

엄마, 난 이제부터라도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자식들에게 다 말하면서 살 거야.
그래야 내 자식들이 미안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야 내 자식들이 평생 미안한 마음 품고 빚진 것처럼 살아가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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