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열심히 사는 것 같다. 그런데 삶은 참 이상하다. 행복을 위해 매일을 갈아 넣는데, 소소한 삶의 순간이 얼마나 기쁜지 나누는 사람은 살짝 재수가… 없다. 반대로 겸손한 어른이 되려다가 자꾸만 중요한 것을 잊은 기분이다.
행복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지만,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지 들여다보는 연습은 꽤나 필요하다. 남들보다 유독 무언가에 행복함을 느끼면 그것을 중심으로 인생을 기획한다.
반대로 어떤 종류의 슬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냐는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에서 반응하는 패턴을 만든다. 그러니 나를 덮고 있는 행복과 슬픔을 잘 짜인 스웨터의 털실처럼 세세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울컥울컥 몰아치는 타인의 슬픔에 관심이 더 많았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나에게 닥친 슬픔이 아니므로 그때는 기꺼이 다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내 슬픔까지 닥치면 혼자 견디지 못하고 하강 에너지가 몸을 바닥으로 끌고 가버렸다.
이제는 상승 에너지가 필요했다. 기쁜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사람이 무슨 자랑을 해도 반듯한 마음으로 들어주고 싶다. 그런 자격증이 있다면 따고 싶을 정도로. 자격증명은 ‘자랑리스너’ 정도면 어떨까.
그러려면 먼저 내가 어떤 행복에 집중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프로답게 끄덕끄덕거리며 들을 수 있으니까.
나는 이러한 행복을 기억한다.
해 질 무렵 작은 꽃 그림자와 계단 손잡이의 그림자를 찍는 거, 골목길을 걷다가 주택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듣고 모르는 가족의 대화를 상상하는 거, 아무도 없는 방에 누워서 눈을 감고 라디오 듣다가 박장대소하는 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대화가 즐거워서 조금 식었을 때 미적지근한 온도, 조금 어색한 자리에서 으쌰으쌰 편한 분위기를 만드는 거, 낯선 이의 환한 미소
어제 저녁부터 굶고 아침에 쎄한 가을 냄새에 마음껏 취하는 거, 머리카락을 잘 말려서 거울을 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하는 거, 러닝을 다 뛰고 머신의 정지 버튼을 가뿐히 누르는 모습이 비치는 거울, 노래를 듣다가 울었다는 간질거리는 고백, 복잡한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빈 문서를 실행할 때의 설렘, 시험 한 시간 전에 쓰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급하게 꺼낸 다이어리, 휴일에 만날 사람이 없어도 썩 괜찮은 기분이 들 때,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쇼핑에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들어간 옷가게에서 발견한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
엄마가 나랑 찍은 사진을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하는 법을 물어보는 거, 한 달만에 통화하는 다섯 살짜리 조카가 어제 만난 것처럼 전 세계 상어 종류를 다 아는지 물어볼 때, 그러다가 내 반응이 맘에 안 들면 인사도 없이 슝 가버릴 때, 어떤 차를 마실지 고민하며 찬찬히 여러 찻잎의 향기를 맡아볼 때
전날 마신 맥주 때문에 속이 안 좋은데 아나스타샤 차를 마시며 루이 암스트롱의 라비앙 로즈를 들을 때, 커튼 뒤에 숨었는데 조카가 와서 들춰낼 때, 매트에 발라당 누웠는데 세 살짜리가 나랑 똑같이 발라당 엎어지며 쳐다보는 웃음, 목적지 없이 걷는 산책, 약간 힘들 때 마침 발견한 카페, 재테크 책을 읽으며 미래를 계획할 때, 꿈의 집을 상상하며 주택청약통장 쌓인 금액을 볼 때, 서재와 침실이 분리되고 근처엔 서점이 있는 아파트를 마음대로 그려 볼 때.
후, 어그로 끌어서 미안하다. 사실 자랑하려고 쓴 글이다. 내가 이렇게나 자세히 순간의 행복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리고 감사의 말을 하고 싶다. 이걸 다 읽은 당신은 이미 프로급 자랑 리스너임이 분명하니까. (근데 끄덕끄덕하면서 읽었을까?)
이번엔 당신의 차례다. 나도 그쪽의 행복 리스트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 어서 빈 문서를 열고 잔뜩 채워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