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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시시 Oct 30. 2022

보라카이, 약봉투, 키키

물담배를 파는 곳


화이트비치에 노을이 펼쳐진다. 수평선 끝에 해가 포장마차의 노란 조명처럼 걸려 있다. 투명한 바닷물이 베이지색 해안가에서 찰랑거린다. 순한 성분의 토너처럼 맑은 바닷물에 두 발을 담갔다. 저 멀리서 키키가 요트아저씨와 흥정을 끝내고 나를 불렀다.


 “해 지기 전에 얼른 바다로 나가자!”


두 달 전부터 컨디션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한 달 전에는 올리브영에서 수분크림을 찾지 못하자 눈물이 왈칵 터졌다. 그날은 일을 하다가 삼십사 더하기 오십육이 버거워 휴대폰 계산기를 꺼냈다. 삼십사를 입력하고 더하기를 누른 순간, 왜 계산기를 꺼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분전환을 한답시고 퇴근길에 올리브영에 갔다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주 전에는 제 발로 롯데리아 건물 이층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은 잦은 눈물 자국 때문에 빨갛게 익은 나의 뺨을 아무런 감정 없이 쳐다보다가, 나의 생활 패턴을 물어보다가, 낮과 밤에 삼킬 손톱만 한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따끔거리는 볼따구가 신경 쓰여서 멋쩍은 웃음을 몇 번 짓다 보니 어느새 약국에서 봉투를 받아서 나왔다.


막걸리메이트 키키는 나의 상태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키키가 제안했다. “다음 주에 보라카이 갈래? 나 재작년에 가봤는데, 넌 그냥 비행기표랑 숙소비만 준비해. 모자라면 나머지는 내가 낼게.”


출발 하루 전, 삼만 원짜리 수영복과 휴대폰 충전기를 챙겼다. 무엇보다 캐리어에 약봉투가 잘 들어있는지 대여섯 번을 확인하고서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 픽업 차량을 타고, 다시 섬으로 들어가는 작은 배를 타고, 가게 문이 다 닫힌 늦은 밤이 돼서야 필리핀 보라카이 섬에 도착했다.


키키와 나는 근처 식당에서 구운 닭고기 요리와 계란찜처럼 생긴 푸딩을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원피스로 갈아입고 화이트비치로 나왔다. 백색 모래장이 펼쳐진 바닷가에는 듬성듬성 야자수 나무들이 서 있었다. 잔잔한 파도는 웨딩드레스처럼 하얀 물방울을 반짝이며 부서지고 있었다. 바닷물에 담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촤르르 펼쳐지는 파도 거품을 만끽했다.


노을이 질 무렵, 삼십 대의 한국인 커플과 키키와 나는 나란히 사인용 요트에 올라탔다. 검은 파마머리에 짙은 갈색 피부의 요트아저씨는 능숙하게 돛에 달린 하얀색 나일론 로프를 당겼다. 바람을 받은 새파란 천이 펄럭이는 소리도 없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자, 요트는 수평선 끝의 노른자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팔과 다리에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오랜 세월을 견딘 고목나무의 기둥처럼 노을빛을 받아 멋지게 빛났다.

그제야 사방을 둘러봤다. 저 멀리에 우리처럼 때를 맞춰 나온 요트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평선 너머로 배를 타고 하염없이 나아가면 언젠가 속초 해변가에 닿을 것만 같았다. 푸른빛 동해 바다 건너 어디에 이렇게 하얀 바다도 있다는 사실을 가족이 알까? 나 혼자 즐기는 게 미안할 만큼 아름다웠다. 키키가 흘깃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스스로가 먼저 행복해야 . 그럼 주변 사람들은 너의 흘러넘치는 행복한 에너지를 받을 거야. 그렇다고  옆에 항상 머무르지는 않고 지나갈 거야. 그건 당연한 거야.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목적지가 있는 거니까, 잠시 서로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사는 거지.”



보라카이에 있던 일주일 동안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로 가득 채웠다. 그 모든 것을 다 말하기란 참 볼품없지만 이렇게 선택해도 심각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몇 번 얻으니 어느새 출국장에 도착해 있었다. 망고과자와 노니비누의 부피를 줄이려고 캐리어를 열었는데, 지퍼 주머니 안쪽에 낯선 종이봉투가 느껴졌다. 여행 첫날 이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약봉투였다.


한국에 오자마자 원인을 알 수 없는 장염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진료실에서 의사가 해외여행을 하고 장티푸스 같은 병에 걸리는 분도 있어요, 혹시 전염병일 수도 있으니 여행 중에 먹은 음식들을 모두 말하세요, 하길래 네? 네! 하다가 약봉투 대신 꼭 쥐고 있는 여행의 조각들을 와르르 쏟았다. 각종 싸구려 길거리 음식, 맥주, 칵테일, 데낄라, 이름 모르는 술, 또 술술술, 과일 안주, 그 모든 것을 파는 곳을 상상할 수 있는 마지막 한마디까지.


“선생님. 물담배도 장염에 영향을 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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