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고 살아야지 어쩌겠어
체육시간에 그늘을 사랑하던 문학소녀는 귀여니의 <내 남자친구에게>를 읽으며 심장 운동만 했다. 그게 다였던 학창 시절 이후로, 진짜로 시작한 운동은 다름 아닌 걷기다.
고백하자면, 걷기를 시작하기에도 큰 맘을 먹어야 했으므로 잔뜩 굳은 얼굴로 도서관에 가서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밑줄 쳐가며 읽었다. <걷기의 인문학>을 나처럼 걸으려고 읽은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 가 아니라, 함께 걷고 싶다.
지금은 매일 걷는다. 하루에 만 보 이상을 반년 째 꾸준히 걷고 있다. 이토록 부지런하게 걸을 수 있는 원동력은 마블 영화처럼 세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걷기의 매력 덕분이다.
속초에 내려와서 엄마와 걸을 때면 아침 여섯 시 반에 집을 나와서 아홉 시 십 분 즈음에 돌아온다. 그렇게 두 시간 사십 분을 내리 걷고 들어오면, 목덜미부터 발목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다. 숨이 가쁘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엄마와 딸은 우선 말없이 한 시간 정도를 걷는다.
나란히 불면증이 있는 모녀는 지난밤 꿈 이야기를 잠시 주고받는다. 그리고 걸음의 속도를 달리해 각자의 멀티버스에 빠져든다. 딸은 그 시간에 주로 직업이나 결혼을 할지 말지 그리고 아기를 낳는다면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지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지 확실하지 않은 세계를 경험한다.
길숙 씨는 과거의 세계로 들어갔다. 옷도 44 사이즈만 입는 또 다른 자신에게 좋다고 따라다니는 성운 씨를 뻥 차 버리라고 말해줄지 고민한다. 그랬다면 또 다른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 상상해 본다. 이 세계에서는 난생처음 먹어본 비프가스를 사준 성운 씨가 그토록 멋졌으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모녀가 한 명은 미래로 미래로, 한 명은 과거로 과거로 시곗바늘을 돌리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여행은 특정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때는 선명한 이야깃거리가 나온다. 집에서 하루 종일 몸을 부대끼며 있을 때는 궁금하기도 조심스러웠던 서로를 조금씩 알아간다. 아침 공기처럼 맑은 담소가 오간다.
길숙 씨는 성운 씨가 여전히 미스터리다. 인생의 반 이상을 같이 살았는데, 이제 좀 알겠다 싶으면 살금살금 변해서 얄밉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천진데 요새는 좋은 쪽으로 바뀌어서 어쩔 수 없이 평생 데리고 살 것 같다. 낭만적인 관계에 소질이 없는 딸이 무심하게 웩, 하고 탄식을 내뱉는다. 길숙 씨는 딸의 오글거림을 재빠르게 눈치를 채고 성운 씨가 엄청 마음에 든다는 게 아니라 아주 조금 나아진 거라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한다.
딸과 엄마가 같은 공간으로 완전히 돌아오고, 속초 해수욕장의 바닷길로 들어섰다. 지난밤에 해안가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파도가 다녀갔다.
다음날 나는 성운 씨와 청대산을 올랐다. 그는 평생을 바친 업을 은퇴하고 도서관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성운 씨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훨씬 어렵다고 말한다. 그나저나 만 보를 걸어야 하는데, 산에서 내려와도 구천 보다. 구백 보는 슈퍼에 들려 밥상에 올릴 쌈채소를 사며 채웠다. 남은 백 보만큼의 여유를 점심밥에 싸서 입 안에 가득 넣는다.
내일도 걷기의 멀티버스로 다녀오리라.
워크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