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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시시 Oct 30. 2022

라면에 담긴 사랑의 패턴

기가 막히게 끓임


만약 당신이 소울푸드가 떡볶이라고 말하면, 속상한 일도 호탕하게 웃어넘기는 귀여운 사람이라 짐작할 것이다. 혹은 삼겹살이라면, 고기를 굽는 이의 애정과 즐거운 기다림이 가득한 불판 앞의 따뜻한 대화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소울푸드가 라면인 사람은 조금 불쌍해 보인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라면이라면 어쩐지 짠 내 나는 고백이다. 소개팅이나 상견례에서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는 질문에 “예, 저는 봉지 라면을 제일 좋아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소울푸드가 떡볶이와 삼겹살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1순위는 언제나 라면이었다. 여덟 살, 아빠의 숙제 검사를 피해서 매일 저녁 할머니 집에 가던 시절을 떠올린다. 숙제는 기억에 없지만, 밤낮으로 먹었던 얼큰한 라면은 생생하다. 집 앞 슈퍼에서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저녁마다 라면 한 봉지, 소주 한 병을 샀다. 할머니 집에 도착하면 나는 달팽이가 집으로 숨듯이 침대에 쏙 들어가 무거운 이불로 몸을 감쌌다.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납작한 전기장판은  금방이라도 불이 날까 봐 겁이 났지만 얼음장 같은 침대를 뜨끈하게 만들어줬다. 그래도 코는 시렸다. 차마 발가락도 빼꼼 내밀지 못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종격투기를 보고 있으면, 할머니는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고, 배추김치와 시원한 보리차를 꺼내 오셨다.


할머니의 저녁은 겨우 두부 세 조각과 신김치, 그리고 소주 한 병이었지만, 나는 혀가 얼얼한 라면에 식은 밥까지 말아서 먹었다. 나름 맵부심이 있어서 식사의 시작과 끝을 다짐할 때 빼고는 보리차에 손도 대지 않았다.


신성한 첫 입은 늘 같았다. 숟가락으로 새빨간 국물을 떠서, 유독 무거운 쇠젓가락으로 조심조심 기다란 면발을 두 가닥 정도 집어 들고, 숟가락에 올린다. 조준이 서툰 왼팔은 그대로 두고, 머리를 움직여 숟가락을 사냥한다. 매콤한 국물과 구불구불한 면발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 '아임 코리안'이라고 텔레비전 너머 격투기 선수에게 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식을 주고 싶은 마음과 먹고 싶은 마음이 만나서 달팽이처럼 조그만 집은 가장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며, 라면 잔치도 뚝 끊겼다. 어쩌다 고향에 내려가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할머니의 얼굴과 뼈만 남은 목, 축축 물갈퀴처럼 늘어나는 손가죽을 보며 괜히 조바심이 났다.


결국 자주 닦달했다. 이제는 자주   없으니, 만났을  무엇이든 우리는 잔치를 해야 한다고. 대접할  있는 최고의 음식들을 말했다. 짜장면, 피자, 탕수육, 치킨할머니는 시큰둥했다. 효도를 할래도 도통 따라 주지를 않는다며 불만을 표시하면, 오래 살면 먹고 싶은  없어진다고 하셨다. 나는  말에 숨겨진 외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마 뒤, 텔레비전에서 요리 예능이 나왔다. 셰프가 집에서 만들 수 있는 라면 요리를 보여 줬다. 하얀 라면의 면발과 스프로 만든 바지락라면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할머니는 그 바지락라면을 뚫어지게 보다가 마침내 저건 좀 먹고 싶다고 하셨고, 먹고 싶은 음식을 닦달하던 나는 막상 '요리 스킬'이 필요해지자 당황스러웠다. 바지락을 사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에 같이 만들어 먹자는 백지 수표를 날리고 할머니 집을 나왔다. 며칠 뒤에 고향에 있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동안 라면은 쳐다보기도 싫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라면을 먹어야 안심이 됐다. 일 년 만에 만난 엄마의 손맛 대신에도, 25만 원짜리 자격증 시험을 보러 가는 날 새벽에도, 휴대폰이 꺼지기 직전 겨우 도착한 여행지의 어느 숙소에서도. 두고 온 것들이 그리워서, 미래가 불안해서, 돈이 없고 마음은 더 가난해서. 라면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제법 밥벌이를 하는 오늘, 서울에는 봄비가 왔다. 날씨가 쌀쌀하길래, 라면이 먹고 싶었다. 홍대에 있다는 유명한 라멘집이 떠올랐다. 바지락 육수의 일본식 라면이 유명한 맛집이었다. 라멘집에 들어서자 일본인 요리사가 통유리 저편에서 심혈을 기울여 면을 뽑고 있었다. 손님들이 나란히 앉는 기다란 식탁 너머로 오랜 시간 끓인 시원한 해물 육수 냄비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꺼운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입 먹으니 생각이 스쳤다. 왜 삶의 패턴은 항상 사랑하는 이에게 내가 베풀 수 있는 것보다 받는 것이 넘칠까? 비가 그쳤다. 집에 돌아오는 길, 아스팔트 바닥에 고인 빗물을 옆으로 피했다. 웅덩이에 얼핏 어른이 된 나의 모습이 보인다. 할머니의 라면을 좋아하던 아이는 바지락라면을 만들지 못해서 평생 갈 죄책감을 얻고 고급 라멘을 사 먹는 어른으로 자랐다.


부엌 찬장 가득히 쌓인 라면이 보인다. 저건 끼니를 대충 때우는 인스턴트가 아니다. 매일 밤 소주를 마셔야만 했던 삶의 무게를 끌어안고, 여덟 살 손녀에게 라면을 끓여주던 여자의 사랑이다. 먼 훗날 누군가에게 라면을 끓여 주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애정이 담긴 표현이 되리라고 믿는다. 이제는 나도 할머니처럼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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