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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시시 Oct 30. 2022

한놈만 걸려 봐, 사랑해 줄 테니까

가을 호르몬 주의보


오후 6시가 추운 저녁에는 알코올이 술술 들어간다. 그런 날이면 밤늦게 집에 들어와서 일기를  깨작거린 기억이 난다. 장판을 튼 지 오래된 방바닥은 밤 사이에 온기 없이 차갑게 식었다. 이제는 집에서도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차가움과 만난다.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다른 손으로 부엌 찬장에서 매끈한 백도자기색 머그컵을 꺼냈다. 브리타 정수기에 물을 받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혼자 있는 집에서 요란한 숙취는 없다.


어제는 몸에 받지도 않는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더니 같이 마신 애가 초봄의 매화 같았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왜 활짝 피어서 신경 쓰이게 하는지. 봄이 올랑 말랑 할 때는 자주 지나는 길에 매화나무 꽃이 눈에 밟혀서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때를 모르고 피어나는 짓이 바보 같지만 추위를 뚫은 용기가 대견하다.


매화에 코를 갖다 대면, 꽃가지에서 야밤에 꺼내 먹던 바나나 껍질 향이 난다. 강렬하지 않지만 섭섭하지도 않을 만큼 비릿한 단내다. 꽃가지를 보다가 며칠 전 술을 마신 그 애가 떠올라서 다짐했다. 너는 초봄에 산책을 하면 만나는 매화를 닮아서, 언제 훅 떠나 버릴지 몰라. 그러니 어서 지나가라. 당연하게도 걔랑 아무 일도 없었다. 요상한 일기가 하나 탄생한 것뿐이다.


이게   탓이다.


아니 그런데 향수도 문제가 많다. (또 다른) 당신의 향수가 문제였다. 잠실에서 저녁을 먹고 석촌 호수를 한 바퀴 도는데 반 바퀴 정도 돌았을 즈음에 반대편에서 오던 사람들에 밀려, 당신의 향수 냄새가 내 옆으로 훅 밀려왔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으면 나는 혼란스러워지는 거. 좋았던   취향에 딱인 향수인지, 향기가 날랑말랑한 우리 사이의 거리인지, 밤공기 냄새랑 섞인 커피 향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슬쩍 스친 손등과 팔목의 움찔거림인지, 수백 가지 가능성이 와글와글 머릿속에 가득 찬다.


그래서 당신이 ‘이 향수 나한테 어울려?’라고 물으면 나는 어버버 할 수밖에 없다. ‘향기가 정말 좋다’고 겨우 대답하는 내 마음을 모르겠거든. 게다가, 혹시, 내가, 설마, 향수가 아니라 다른 뭔가를 좋아했다면, 그건 또 어떤 종류의 마음일지도 모르므로. 이렇게 쓰나마나한 글이 또 하나 탄생했다.


이게  향수 탓이다.


체취가 있는 남의 향수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저 향기는 결코 내 향기가 아니고 지나가는 향이다. 그러니까 남의 향기를 반가워하되, 향기가 계속 곁에 머무르기를 너무 욕심내지는 말아야지(싫어, 곁에 있어줘).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그러니 기적을 바란다). 게다가 만약 향기가 계속된다면 자신의 향기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새로운 향기를 만들어낼 수도…?).


실은 이게  호르몬 탓이다.


못다 한 말을 쏟았다. 당신들의 샴푸 냄새와 당신들이 살아내는 모든 장소와 습관이 배어 있는 그 복잡 미묘한 향기를 그리워할 거야. 그 그리움에 당신의 이름을 짓고 일기를 쓰고 또 쓰고 백날 천날 기억하겠지.


한놈만 제대로 걸려 봐, 아주 사랑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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