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목하라 Oct 18. 2020

한국에서 잠깐 살았어요

몽골에게 말걸기 - 열린의사회와 함께 한 몽골의료봉사기(11)


  “우리 엄마 순서는 몇 번째인가요?” 어눌하지만 정확한 한국말이었다. 

  “한국말을 할 줄 아세요?” 

  “한국에서 잠깐 살았어요” 


  그의 언어 구사는 기본적인 생활어 수준으로 능숙하지 않았다.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엄마라 했다. 남자는 거친 외양에 비해 순해 보이는 말투와 눈빛을 지녔다. 그는 한국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이 생각이 오래 머물게 된 것은 한국을 찾는 많은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행여나 상처받고 떠나지 않았을까? 다쳐서 떠난 건 아닐까? 그에게 한국인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무엇 때문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을까?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86년부터다. 당시만 해도 이주노동자를 위한 합법적 체류 비자가 없었다. 관광이나 단기 방문으로 들어와 불법 체류하며 저임금 노동을 했다. 그 후 2003년부터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었고 고용이 합법화되었지만, 미등록 체류자들은 강제단속과 추방으로 이어졌다. 고용허가제는 3년간 3번의 사업장 이동만 가능하고 이를 어기면 불법 체류 노동자가 되어 추방대상자가 된다. 고용에서 퇴직까지 모든 권한이 교용주에게 있으므로 이주노동자에게는 노예제도나 마찬가지다.    


 나의 작은 아버지는 1980년대 서울 근교에서 하우스 농업을 하셨다. 힘든 농사일을 내국인들은 하지 않으려 해 대부분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한다고 했다. 주로 몽골인들을 고용했는데 그들은 추위나 더위에 적응을 잘하고 성실하게 일을 잘한다고 했다.  

 어느 해인가는 몽골 양털 조끼를 입고 오셔서 아버지에게 입혀주셨다, 몽골 노동자에게 선물 받았는데 너무 따뜻하고 좋다는 거였다. 그 좋은 것을 등이 시린 형에게 입혀주고 간 것이다. 우리는 문풍지로 바람이 들어오는 겨울밤에 서로 먼저 그 황토색 양털 조끼를 입으려 했다. 디자인은 투박하지만 참 따뜻했다는 기억 남아있다. 형에게 주고 싶었는데 입었던 것이라 일부러 입고 오신 듯했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나의 아버지를 제외한 아버지의 형제와 사촌들은 대부분 서울에 정착했다. 돈벌이를 찾아 서울로 떠난 그들은 오직 몸 하나로 서울살이에 정착했다.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잘 아는 작은 아버지는 적어도 악덕 ‘사장님’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몽골인은 4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이 이곳에서 성실히 일하는 이유는 고국에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독일로 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노동자가 되어 떠났고 다시 돌아왔듯 그들도 건강하게 고국으로 돌아갈 이유가 있다.    


  최규석의 웹툰 <송곳>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우리의 무의식적 편견 속에 이주노동자들은 어떠한가? 내가 사는 지방 소도시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이주노동자들이다. 실제로 공단에서 일하는 그들의 보금자리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나’ 싶을 만큼 엉망이었고 숙소는 공장 옆에 있어서 언제든 바로 투입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모든 것이 고용주 입장의 주거환경이다. 고용주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내면에는 ‘차별’이 당연시 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확진자의 개인 동선이 밝혀지자 그곳에 있었던 다른 이들까지 공공의 적이 되었었다. 이태원사고가 터졌을 때 감염인은 전파자가 아니라 그저 감염된 사람일 뿐인데도 감염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혐오자가 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 국가인권위 인식조사(2020년)에 “나도 차별과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라는 질문에 91.1%가 “그렇다”로 응답했다고 한다. 누구나 코로나 19 감염자가 될 수 있고 그렇다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개인의 인권은 국가의 당위성 앞에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차별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우리와 얼굴 색깔이 다른 이주노동자들과 외딴곳에서 부딪히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이 본능처럼 내재 되어 있다. 인간은 공포심은 스스로를 약자로 만든다. 아니, 약자가 되는 시스템 속에 놓이게 된다. 내가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외국인, 혹은 어두운 골목에서 만나는 남성들. 그들의 선량함과는 상관없이 그들도 이유없는 피해자가 된다. 공포심도 차별을 불러온다. 


  다리 한쪽을 살짝 절고 있는 저 남자에게 한국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진료를 마치고 출구를 향해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한국이 공포였다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진료를 받으러 오진 않았겠지. 이렇게 위안을 해 본다.





이전 10화 태양이 낳은 몽골의 아이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