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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하라 Oct 18. 2020

태양이 낳은 몽골의 아이들

몽골에게 말걸기-열린의사회와 함께 한 몽골의료봉사기(10)


  어떤 풍경은 비현실적이라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몽환적일 때가 있다. 적십자캠프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져 초원을 산책할 때였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양 떼나 염소 떼의 거처가 아니라 꽃상추와 쌈채소, 열무와 방울토마토가 자라고 있었다. 


 어릴 때 우리집 텃밭은 채소들의 꽃밭이었다. 아욱, 쑥갓, 부추는 특히 꽃이 예쁘다.  실용성이 다했다고 쉽게 뽑아내지 않았다. 아욱은 연보라빛을 띤 흰색 꽃이 피었고 쑥갓은 노랑꽃을, 부추는 하얀 꽃을 피웠다. 이 집의 채소밭도 꽃밭이다. 아욱이 접시꽃만한 크기의 보라색 꽃을 피웠다. 당아욱이라 하는데 이것은 식용이 아니라 관상용 아욱이다. 


  유목민의 운명은 떠도는 것이고 초원에 사는 사람들은 유목하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초원에 마치 꿈처럼 연하고 탐스런 채소들이 자라는 집이 있었다. 척박한 땅이 아닌 기름지고 촉촉한 땅이었다. 꽃밭인지 채소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키 큰 코스모스가 무리 지어 자라고 있었고 온갖 들꽃들이 타이어 화분 속에 가득했다. 요정이 마술을 부려 꽃들을 피워 놓은 것 같았다. 그 요정의 주인은 똑똑하기까지 해서 꽃상추 송이마다 페트병을 꽂아 한낮의 뜨거움과 밤의 추운 기운 속에서도 부드럽고 연한 상추를 만들었다.  


  저 연하고 부드러운 상추를 한 번만 먹어 봤으면......  이런 욕심이 드는 순간 그림형제의 잔혹동화 라푼첼이 생각났다. 라푼첼은 상추라는 뜻이다. 아이가 없어 고민하던 부부에게 아기가 생겼는데 부인은 입덧으로 상추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상추가 있는 요정(마녀)의 집 담을 넘어 상추를 가져온다. 아내는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또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말한다. 남편은 다시 요정의 집을 넘는다. 이번엔 요정에게 들키고 만다. 아기가 태어나면 요정에게 주기로 하고 상추를 받아 온다. 억센 풀들만 자라는 척박한 초원에 이 집은 요정의 집이 분명하다. 상추 같은 건 절대 손대지 않을 거다. 내 딸은 아직 열세 살이다.    


 그 집 앞에 사내아이 셋이 놀고 있었다. 아이를 낳은 부모는 보이지 않았다. (초원에서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정상적이다.)  예닐곱 살의 사내아이 셋이 팬티만 입고 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의 놀잇감은 물총 하나와 세발자전거 한 대가 전부였다. 누가 첫째냐는 나의 보디랭귀지에 손가락으로 키가 중간인 아이를 가리켰다. 키가 제일 큰 아이(그래 봐야 고만고만했다) 에게 네가 큰 형이 아니냐는 몸짓에 아이는 쑥스러운 듯 형 뒤에 몸을 숨긴다. 맏이는 맏이다운 면모로 동생들을 보호하는 사명을 띤 얼굴로 물러섬 없이 바라본다. 밤톨처럼 생긴 사내아이 셋은 언덕길에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서 막내를 뒤에 태우고는 쌩쌩 내려왔다. 

  망망대해 같은 초원에 오직 집 한 채가 있는데 그 집에는 삼 형제가 살고 있다. 이 삼 형제에게는 세발자전거가 있었는데 녹슬고 덜컹거리긴 했으나 삼 형제처럼 잘 굴러갔다.   


  어린 날 우리 집 오 남매는 각자 자기 친구들을 찾아 집을 나섰다. 동네에 나가면 또래 친구들이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잔 감정싸움이 있는 날이면 놀러 나가는 언니를 몰래 따라나섰다. 언니는 도끼눈을 뜨고 따라오지 말라 했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고 따라가면 돌을 던져 내몰았다. 물론, 나도 동생에게 그랬다. 어두워지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평상에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셌다. 특별한 놀이기구 없이도 우리는 싸우며 잘 놀았다. 


  지금 아이들은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가지도 않고 형제들끼리 놀이터에 가지도 않는다. 스마트폰과 유튜브로 논다.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를 거쳐 인공지능 세대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세대를 빠르게 거쳐 온 나는 그 속도만큼 늙어버린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내가 염려하는 것보다 밝을지는 모르겠지만 좀 쉽게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몸으로 서로를 부비는 온기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라는 걸 안다. 몸을 비비며 살아온 사람들은 쉽게 서로를 잊지 못한다. 풀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것과 같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비비고, 받아들이는 치열한 과정에서 서로를 자라게 한다. 단단한 땅을 비비고 들어가는 나무의 용기가 나무를 더 크게 자라게 하고, 부드러운 흙의 포옹을 받아들이는 꽃나무가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몽골 초원의 삼 형제는 노을이 질 때까지 팬티 바람으로 때글때글 익어간다. 아이들은 햇살과 바람과 흙의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랄 것이다. 몽골에서 나를 즐겁게 한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특히, 이 삼 형제가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내 어린 날의 오 남매를 소환시켰기 때문일까?


  척박한 땅 몽골. 그러나 그런 땅에서 피어나는 꽃은 진한 향기와 바람에 쉽게 꺾이지 않는 강인함을 지녔다. 몽골의 햇살이 그대로 내려앉아 몽돌처럼 반질거리는 아이들의 얼굴. 낯선 이를 보면서도 두려움 없이 해맑은 아이들. 자연의 햇살을 받고 자란 아이들의 투명함이 온몸에 퍼져있었다.


  나 어릴 때 꼭 저런 얼굴이었는데. 온종일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던 우리들의 얼굴에도 햇살이 늘 내려앉아 있었다. 겨울이면 텄고 봄이면 버짐이 폈다. 여름에는 물렀고 가을이면 영글었다. 지금은 도시든 시골이든 아이들의 얼굴의 희멀건 하다. 한국에만 있을 때는 내 아이의 얼굴이 당연했는데 몽골의 아이들과 있으니 우리 아이들의 경계에 가득 찬 얼굴이 보였다. 햇살과 바람으로 영글은 아이들은 주눅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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