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강아지 산책

비록 제 반려는 아니지만요

by 평정

내 강아지는 없지만, 아는 강아지는 한 마리 있다. 하얗고, 허리는 긴데 다리는 짧으며, 털은 퐁실퐁실한 아이. 누구는 말티즈라 하고, 누구는 말티푸라 하고, 포메라니안도 있다고, 스피츠도 보인다고 하는, 하얗다는 강아지들은 다 섞인 것 같은 잡종. 덕분에 슬개골 걱정 없을 정도로 건강하고 튼튼한 믹스견.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지만, 주인 말로는 절대 잡종 아니고 믹스견이란다. 아무튼 만날 때마다 반갑다고 멍멍멍. 엄청난 환대에 열심히 놀아 주고, 간식 주고, 간간이 산책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없던 유일무이한 관계이다.


지금껏 동물은 낯설기만 한 존재였다. 단 한 번도 털북숭이 생물을 가까이 한 적 없으니 당연했다. 어릴 적 키우고 싶다고 한 번쯤 떼를 써볼 만 하지만, 어린이의 순수한 호기심 따위 진즉 싹을 잘라 놓은 어른들 탓에 반려동물은 꿈도 못 꿨다. 흙 한 줌 없는 주변 환경도 마땅치 않았다. 무엇보다 강아지는 내가 무서워했다. 시골 동네에서 마주쳤던 건 작고 귀엽고 순한 강아지가 아니라 크고 시커멓고 사나운 ‘개’였다. 하나같이 날 보고 어찌나 짖어 대는지, 말만 통했다면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수십 번 물었을 테다. 게다가 운 나쁘게 두어 번 물릴 뻔도 했으니,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일 수밖에. 넓은 길 한복판에 개 한 마리 서 있다고 저 멀리 돌아가기 일쑤였다. 반경 2m 내 접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인이 된 뒤에도 심리적 거리감은 여전했다. 믿을 수 있는 주인이 곁에 있기에 짐짓 태연한 척할 뿐, 살짝 쓰다듬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 내게 작고 하얀 솜뭉치가 폴짝폴짝 다가와 무해함을 어필하더니, 기어코 falling love 시킨 것이다. 첫사랑보다 강력한 하트 어택이었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뽀시래기 시절부터 만나니 겁나긴커녕, 다 큰 뒤에도 떵떵 소리칠 수 있는 유일한 강아지였다. 곁다리로 간접 육아한 덕분에 강아지 이해도는 쑥쑥 올라 ‘사람과 같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건너 건너 조카 같은 우리 강아지가 생겼다.


근래에는 시간도 많고, 날도 선선해 일하러 간 주인 대신 홀로 강아지와 낮 산책을 나갔다. 예전에는 주로 밤에 따라나서는 경우였는데, 인간의 입장에선 산책이라기보단 하루 숙제를 해결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여가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강아지에, 강아지에 의한, 강아지를 위한’ 맞춤형 산책 중! 맡고 싶은 냄새는 원 없이 맡게 해 주고, 먼저 발을 뗄 때까지 한 없이 기다려준다. 앞만 보고 10분 만에 주파하던 거리를 30분 가까이 세월아~ 네월아~ 걷는다. 그래도 뭐, 괜찮지. 네가 바쁘냐, 내가 바쁘냐? 아무도 바쁜 이 없으니 한가롭기 그지없다. 덩달아 나도 한 걸음에 가을 냄새, 한 걸음에 풀 냄새 맡으며 걸음걸음 음미하니, 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긴 연휴에도 불구하고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니 그리워진다. 실룩거리는 포동한 엉덩이, 살랑이는 흰 꼬리, 사뿐사뿐 경쾌한 발걸음. 견고하던 벽을 허물고 세상 모든 강아지에게 마음을 열게 해 준,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 비록 이건 나만의 일방적인 마음일 뿐이고. 너의 마음속 내 순위는 저어기 아래, 고구마 줄 때만 1순위로 반짝 등극하는 정도일지 몰라도. 혼자만의 세레나데가 절절하다. 이래서 첫정이 무섭다고 하나?


내 마음을 뺏어간 첫 번째 강아지야, 해가 나면 또 만나.




keyword
이전 11화오늘도 살기 위해 필라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