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쓰다/7
책모임을 하다보면 가끔 종교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도마위에 오르는 건 당연 교회와 기독교다. 오늘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책 나눔을 하며 하필 종교 이야기가 나왔다. 대놓고 개독교라 칭하는 이도 있고 교회를 경험(?)해서 아는 이는 교회에 대한 현란한 수사를 늘어 놓는다.
신의 존재를 믿고 구하며 한번도 신을 의심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모태신앙이기라서일까? 신의 존재를 의심한 적은 없다.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자연만물에 경이로움을 단 한번이라도 느꼈다면 그 존재감이 곧 신과 같이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이사야 12장 5절-
신이 있다면 전쟁이 왜 일어나고 왜 이유없이 사람이 죽어야 하나?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세상을 다스리라 명하셨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한 자유의지는 사람의 몫이다. 애초부터 신이 결정하신 일이라면 신은 왜 그런 나쁜 일을 저지르나?라는 질문에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그 전쟁가운데 거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이었다고 해야 할까?
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납득이 될 만한 내가 아는 지식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믿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할 뿐이다. 자녀가 부모 아래 있지만 자녀의 일을 부모가 다 막지 못하고 알 수 없다고 하면 조금 이해가 될까?
한편으로 요즘 은혜를 받고 있는 새신자가 떠올랐다. 그분이 교회를 선택한 연유는 무엇일지 말이다. 오늘 한번 여쭤봐야 할 거 같다. 보통은 더 이상 의지할 무언가를 찾지 못하거나 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권유에 의해서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즘 교회를 권유한다고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그 새신자를 교회로 이끈 것은 한 교회에서 어릴 때부터 오래 신앙 생활을 한 내 친구이다. 그 친구는 전도를 잘한다. 그런데 전도라고 하기에 그 친구는 하나님을 전하지 않는다. 교회가 집같고 교회가 생활인 그 친구는 그저 자신이 아는 사람을 자신이 익숙한 공간에 이끈것 뿐이다. (친구가 믿음이 있다고 장담은 못한다. 내가 장담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렇기에 새신자는 교회를 온다기 보다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지인이 자주 거하는 곳에 도장 찍듯이 오가다 새신자 교육을 받고 정착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새신자는 내 친구가 교회로 이끌기 전 새신자 형님으로부터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는 한다.
요즘은 전도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제 발로 교회를 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 물론 제 발로 온 젊은 성도들을 간간히 보면서 놀라긴 한다. 우리 교회가 재건축을 하고 아파트 주변에 꽤 괜찮은 건물로 지어져서인지 접근성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던 하나님은 여전히 부르시고자 하는 이들을 교회로 이끄신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차라리 아예 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면 신을 믿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간절하거나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하지 않으셨구나 하지만 교회를 다녔었고 교회를 아는 사람이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이 교인으로서 가장 안타깝다.
신 때문에 떠나는 이는 없다. 사람때문에 교회를 떠나지,라는 말을 조심스레 전해본다. 신과 교회는 잘못이 없다.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이 일으킨 일들이 신과 교회를 욕 먹이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는 더욱 더 경건에 힘쓰고 입을 조심할 것이다. 쉽지 않지만 말이다.
나는 어느 모임에서건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스스럼없이 한다. 종교색이 강하기 보다는 모태부터 믿음이 당연한 줄 알고 교회를 평생 떠나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냥 기독교는 곧 내 신분이나 마찬가지다. 대놓고 자랑스레 전도를 하거나 교회로 이끌진 않지만 적어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저 사람이 교회를 다녀? 라는 말은 적어도 듣지 않는다.
전도라는 것이 대단하 것이 아니다. 그저 믿는 자들이 그 믿음을 흘러 보내는 것,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다운 면모를 다지고 보이는 것, 그것이 곧 전도가 아닐까?
그리고 믿지 않거나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이에게 특권 의식마냥 신으로 으시대지 않는 것, 다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지으셨으나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그 이상 무엇이 있을까 싶다.
죽음의 수용소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는 신에게 무엇을 구할까? 신을 탓할까? 신께 구원을 요청할까? 그 역시 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신을 믿는다는 우리가 선택할 영역이다. 구원을 바랄지 탓을 하지를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선택권을 우리에게 넘기셨다는 것, 그것이 전쟁이 일어나고 그 전쟁중에 무고한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대답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