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주책에 관하여
1화를 쓰려고 앉았다. 와, 안 써진다. 정말 안 써진다. 공모전 응모할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막상 연재될 글이라 생각하니 내 속에서 온갖 검열장치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단순해' '아니지, 이건 너무 극단적이라고 느낄지도 몰라' '이렇게 말했다가 오해하면 어떡해?' '눈치 보느라 정작 해야 할 이야기는 아무것도 못하는 거 아니야?' '근데 누가 눈치 줬어?' 머릿속에 겨자풀 1번부터 겨자풀 2345번까지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느라 난리다.
일단 그 목소리들을 좀 잠재우려 연재에 임하는 각오에 관해 적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처음 배운 내용들을 다시 복습했다. 어떤 태도로 썼더라, 어떤 마음으로 임했더라. '그래, 괜찮아' 혼자 다독이기를 아침저녁으로 반복했다. 소용없었다.
기한이 다가와 꾸역꾸역 1화를 썼다. 진지한 연재글을 쓸 때 활용했던 ai합평(합평 기준을 입력 후 내 글을 비평하도록 만든 것) 창을 열고 내 글을 입력했다. 촤라라라라라 뜬 비평의 첫마디는 "이 글은 00님답지 않아요. 그동안 썼던 글들과 매우 다릅니다"였다.
친한 지인 둘에게 초고를 한 번만 읽어봐 달라 했다. 똑같은 말을 들었다. "음... 이 글은 00님 글 같지가 않아요. 쓰면서 굉장히 답답하지 않으셨어요? 글 쓴 본인이 제일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나머지 한 분의 반응은 더 절망적이었다. "이 글은... 00님 아니어도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입니다. 프롤로그랑 전혀 달라요."
'아, 망했구나.'
쓰면서도 이미 망했다 싶었지만 삼연타로 확인사살 당하고 나니 더 절망스러웠다. 다행히 그게 끝은 아니었다. 팩폭만 하고 도망갈 분들이 아니었다. 글이 안 써져도 너무 안 써진다고 고민을 털어놓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00님 글에는 따뜻함이 있어요. 이야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받는다 느끼게 하는. 그 따뜻함을 다시 꺼내서 써보세요. 할 수 있어요."
"00님은 원래 쓰던 사람이기 때문에 힘 빼고 편하게 쓰면 됩니다, 그냥. 너무 쫄지 말고 일단 막 쓰세요!"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고마웠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두려움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이런 말 때문에 나를 오해하면 어떡하지?'
비장함이 가득했다. '학대 가정에 관해 사람들이 꼭 잘 알아야 해. 모든 오해를 풀어줘야 해.'
보이지 않는 곳에 살기도 서려 있었다. '그동안 학대 가정을 향해 2차 가해를 하던 사람들, 그만 좀 해!'
그저 나를 보여주고 싶어 쓴 글이 아니었다. 누가 나를 볼까 봐 두려워 꽁꽁 숨은 글이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를 찌르지는 않을까 잔뜩 겁먹은 마음으로 한 문단 한 문단 방패처럼 쌓아 올린 글이었다. 나다울 리가 없었다.
내 안에 가시나무를 발견했던 때를 떠올렸다. 행여나 부지중에 누군가를 찌르지 않을까 염려하던 마음은, 어느새 가시가 아닌 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너무 길어, 싹둑. 너무 굵어, 싹둑. 여긴 거칠잖아, 싹둑, 여긴 덜 자란 것 같아, 싹둑. 그때 그 다짐이 이렇게나 큰 비장함이 되어 나를 찌를 줄 몰랐다.
초고를 버렸다. 시간은 촉박했지만,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두 잠든 밤, 컴퓨터 앞에 앉아 새 문서를 열었다. 나를 따뜻하다 여기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내 글을 아껴주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여줄 문장을 차곡차곡 쌓았다. 무기 하나 없이 전쟁터에 던져진 사람처럼 땅을 파고 들어가 숨어 있던 나를 만났다. 손을 내밀며 말했다.
'괜찮아, 아무도 해치지 않아. 그냥 니 모습 그대로 나와.'
그렇게 마무리 한 원고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ai 합평도 시키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을 써내려 간 후 가장 큰 위안을 받은 건 나였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 그래.' 담당 팀장님에게 이메일을 보내며 기대했다. 내 글을 다시 볼 날을. 내가 보여준 마음 안에서 다시 나를 만날 날을.
비장함을 버리니 나다움이 찾아왔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던 주책을 벗으니 홀가분이 나를 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