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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May 18. 2024

기계는 친절하지 않다.

더욱 어려워진 삶

"처방전을 다시 받아 오셔야겠어요."

"네?"

"환자 분, 산정특례가 끝났는데 이건 산정특례로 나온 처방전이에요."

"다시 병원에 갔다 와야 한다고요?"

"네."

"진짜요?"

"네."

"흐음..."


나는 이미 지쳤다. 나가서 약 백 미터를 가서 지하도로 길을 건너서 다시 약 이백 미터를 가서 병원 간판을 만나면 또 백 미터 이상을 걸어서 본관으로 들어가 삼 층 갑상선 외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처방전을 재발급받고 다시 같은 길을 반복하여 약국에서 약을 사서 다시 병원 주차장으로 가야 한다.


아주 피곤한 기분으로 병원 갑상선 외과에 갔다. 이미 다섯 시가 넘은 시간이라 다 끝나고 퇴근했으면 어떡하지 초조하다. 열심히 갔다. 다행히 아직 접수를 지키는 분이 계셨다.


"처방전을 산정특례가 아닌 걸로 받아오라는데요?"

"네? 어디서요?"

"00 약국이요."

"무슨 말이에요. 우린 산정특례 빼고 접수했는데. 이거 기계에서 뽑으셨어요?"

"네."

"그래서 그래요. 1층 원무과로 가셔서 바꿔달라고 하세요."

"아... 늦지 않았나요?"

"다섯 시 반까지니까 빨리 가세요."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이십칠 분이다. 빠른 걸음으로 원무과에 갔다. 한 번도 1층 원무과를 이용해 본 적이 없다. 늘 3층 수납기계에서 해결했던 것이다. 1층 원무과 앞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어버버 번호표 뽑는 곳을 모르겠어서 그냥 창구로 직접 갔다.


"오늘은 손님이 없으셔서 그냥 해 드리지만, 앞으론 번호표 뽑으셔야 돼요 "

"그런데, 이거 기계에서 했다고 잘못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8만 3천 원 더 결제하셔야 합니다."

"여기 있어요."

"두 번 나눠서 결제됩니다. 다음번 검사비용까지 결제해서요."

"아까 기계로 한 건 취소 안 해 주시나요?"

"추가 비용 받는 거예요. 취소가 아니고."


비싸다. 여태껏 만 원 정도 냈던 것 같은데 이제 10만 원 돈이 되었다. 한숨이 나온다. 돈이 비싸서도 그렇고 왔다 갔다 힘든 것도 그렇고. 결제를 마치고 처방전을 받고 다시 약국으로 갔다. 약을 타고 그 길 그대로 주차장으로 간다. 이 길만 네 번을 왔다 갔다 하는구나.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가 문을 쫙 열고 있다. 반갑지 않다. 불안하다. 왜 너는 혼자 문을 열고 있니. 역시나. 버튼이 눌러지지 않는다. 그냥 열려 있는 것이다. 일이 꼬일 때는 와장창 꼬인다.  피곤함을 느끼며 짜증이 났다. 환잔데 보호받지 못하는 느낌이다. 계단으로 두 층을 내려가 차를 만났다.






처음 수납기로 결제했을 때 그잖아도 이상하다 했었다. 이제 오 년이 지났는데 금액이 적은 걸 보고 그래도 갑상선 진료는 평생 저렴한가 보다, 대한민국 좋은 나라. 쾌재를 불렀었다. 그러나 나의 착각이었다. 그 이상함을 바로 확인하지 않은 대가로 상당히 번거로운 일정을 소화했다.


수납 및 처방전 발급기가 그동안 편리하기만 했었는데 오늘은 원망스러웠다. 기계는 사과하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도 항의할 수 없었다. 원무과 직원에게 볼멘소리를 해 봤으나 직원은 가볍게 무시하며 응대하지 않았다. 본인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게다.


병원을 오는 길에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 먹었었다. 그때도 키오스크를 이용했는데 의도와 상관없이 어쩌다 터치가 되어 취소하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문득 사람에게 주문했던 시절이 더 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AI가 많은 분야를 차지하면서 사람의 일자리가 준 것은 확실히 맞는데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은 오히려 더 많은 걸 감당해 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카운터에 가서 "이거 이거 주세요." 하면 됐을 일을 내가 화면을 보고 터치를 하고 장바구니에 담고 장바구니로 가서 결제를 누르고 카드를 꽂고 영수증을 받아야 한다. 병원 건도 그렇다. 진료카드를 내밀고 결제를 하고 처방전을 받고 "아직 산정특례 기간이 남았나요?" 질문하면 됐을 일이었다. 그러나 기계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약국에 갔다가 다시 병원에 왔다가 다시 원무과에 갔다가 다시 약국을 갔어야 했다.


영화 티켓도, 비행기 티켓팅도 다 손수 하는 시대다. 그래서 소외되는 계층이 생긴다. 나도 이제 뒤처질까 불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인가. 티맵을 놓쳤다. 티맵 반응이 좀 빠르다. 내 앞엔 왼쪽 길이 없는데 왼쪽으로 가란다. 망설이다 시키는 대로 왼쪽으로 갔다가 유턴한 꼴이 되었다. 유턴을 하면 샛길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다시 시작이었다. 한 바퀴를 그냥 돌고 또다시 그 앞에서 고민하다 맵을 뚫어져라 봤다. 길 모양을 보니 안내가 빨랐던 것이다. 길 따라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 방향이다. 나는 아직 오른쪽으로 가질 않았는데 티맵은 왼쪽으로 가라고 안내한다. 아리야, 아니잖아. 아리는 대답이 없다.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길이라서 그런가. 워낙 길치라서 그런가. 다 맞지만 길을 익히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게를 무조건적으로 의지한 것이다. 그때그때 도로 상황에 따라 최적의 길을 알려주는 아리만 의존해서 매번 초행길이 돼 버렸다. 그래서 당하는 것도 있다. 아리도 친절하지 않다.


편리한 AI 시대에서 기계의 오류나 인간의 실수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실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AI는 오류가 나올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어찌하나. 함께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시간이 흘러 벌써 암 수술한 지 오 년이 지났고 산정특례가 끝났다. '벌써'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오 년은 꽤나 지루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병원 진료를 받고 약을 타 가면서 참 더디다고 생각했었더랬다. 검사 결과는 매우 양호했다. 갑상선암은 착한 암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암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있었는데 이제 좀 가벼워진 기분이다.


그러나 진료 결과와 상관없이 기계의 불친절함에 참 피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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