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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Jun 15. 2024

역할 기대 2

잘하고 싶은 마음

1. 딸 노릇


일주일 실습 지도를 앞두고 짬이 났다. 부모님을 뵈러 갈 시간이 마땅치 않았는데 혼자라도 가 보자. 나는 뙤약볕에 잠깐 망설였지만 운전대를 잡았다. 내 오래된 차는 선팅이 약한지 햇볕이 차단이 안 된다. 땀이 줄줄 난다. 이제 와서 새로 선팅을 할 수도 없고 참 어렵다.


뜨거운 햇살을 뚫고 친정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니 기진맥진. 시원한 수박을 얻어먹고 넋 놓고 있었다. 가족들의 안부를 전하며 수다. 부모님의 늙으신 모습은 참 마음이 아프다.


백숙 하나에 오이 샐러드로 차려진 점심에 또 한 번 뭉클했다. 백숙이 있긴 했지만 이런 간단한 차림은 또 처음이다. 그동안 언제나 육해공이 함께 있는 상만 봤었는데 이제 형편도 체력도 녹록지 않으심이 점심 상이 말해 주는 듯했다.


크게 살갑지도 못한 채 귀가 어두우신 아빠 대신 전화받아 주고 몸이 안 좋으신 엄마 살피고 좀 자다 다시 땀 흘리며 왔다. 오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좀 더 웃어 드리고 올걸 여전히 애처럼 투덜거리기만 했다.


2. 엄마 노릇


아이 영어 공부방이 갑자기 문을 닫게 되었다. 이제 곧 기말을 앞두고 마땅한 학원을 수소문했다. 이미 시험 대비가 들어갔다며 새로운 원생은 기말 이후에 받는다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이참에 혼자 해 보라 하고 학원비를 줄여볼까 잠깐 고민했으나 아이는 혼자는 불안하단다. 불현듯 오래전에 소개받았던 곳이 생각나 검색을 해 보았고 시험 대비 합류를 시켜준다는 답을 얻었다.


오늘 첫 수업일. 친정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를 차에 태웠다. 첫날이니 데려다줄게. 마을버스 배차가 길다고 애가 입이 대빨 나와 있던 터였다. 우리 귀요미를 무사히 데려다주고 한숨 돌린다.


3. 교사 노릇


부끄럽지 않은, 도덕적 우위에 있는 교사이고 싶었고 그러리라, 그럴 수 있다 생각했었다. 그것은 엄마로서 아내로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번에 알았다. 생각만 있었을 뿐 예민함과 실천력이 없었음을. 일상에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가 사람을 참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이제 또 아이들을 보러 간다. 나는 어떤 모습과 태도로 그곳에 갈 것인가. 나의 생활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많은 역할들에서 나는 버거움을 느꼈다. 역할은 감정과 행동을 수반하고 그것들은 책임을 요구한다. 나는 말만 번지르르했을 뿐 내 감정과 행동에 무게감이 없었다. 그게 그렇게 부끄럽다.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역할에 감사해야 한다. 나는 이제라도 알았으니 만회를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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