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늘 흔들리며 산다
이영진
경의선. 집 근처에 있어 즐겨 타는 노선이다. 덜커덩거리는 소음과 진동이 참 좋다. 적당한 불편이 사람을 편하게 하기도 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전철 벽에 붙어있는 수도권 전철 노선도. 여러 가지 색으로 촘촘히 표시되어 있다. 알지도 못하는 낯선 지명과 여러 노선.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이토록 많은 철도 노선이 있었던가? 만원 버스에 눌리고 눌려 학교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버스는 정체 때문에 나를 괴롭히지만, 전철은 쾌적하고 시원하며, 원하는 시간에 정확하게 데려다주는 최고의 교통수단이다. 오늘도 전철을 타고 가며, 살아가는 여러 모습을 본다.
# 1. 꼰대
지하철 문 앞에 서서 서로 끌어안고 마스크 위로 몇 번씩 키스를 나눈다. 저렇게 좋을까? 코로나 시대에 고생 많이 한다. 젊어 몸이 뜨거워 그런지, 젊어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점점 나만 꼰대가 되어간다
# 2. 안개 속 출근길
뿌연 안개 속 언뜻언뜻 비치는 풍경들이 아름답다. 차창을 통해 펼쳐지는 그림들. 화창한 날은 상큼해서 좋고, 비 오는 날은 눅눅한 어두움이 좋다.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대로 잔가지 흔들어 벚꽃이 지며, 꽃눈이 하얗게 내린다. 눈 내리는 날은 모든 풍경이 착 가라앉아 차분하게 내게 다가온다. 꽃이 피면 꽃들의 웃는 모습이 즐겁고, 여름날 세찬 빗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가을 단풍이 펼쳐지면 어딘가로 멀리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경의선은 지상으로만 다녀서, 언제나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산과 들, 푸른 강물과 하늘 어느 것 하나 곱지 않은 게 없다. 이 풍경들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다.
# 3. 퇴근(退勤)
연속되는 진동. 반복되는 소음. 이따금 나오는 안내방송. 피곤함에 지친 나, 스르르 눈이 감긴다. 숙면. 이따금 새가 울어 잠에서 깬다. 여기가 어딘가. 까톡 까톡.
퇴근길 지하철. 나무처럼 서 있는 사람들에게서 새가 운다. 까톡새!
# 4. 인천 행(行)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 나서, 승차한 인천 지하철 1호선. 출발역이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내 옆, 태극기가 잔뜩 붙어있는 공수부대 옷의 할아버지. 맞은 편 임산부석에 앉은 젊은 남학생에게 한마디 한다. “어이” 바닥에 쓰인 ‘임산부 배려석’이라는 글씨를 가리킨다. 학생이 어리둥절하여, “예?”하고 물으니, “음”하고 ‘임산부 배려석’이라 쓰인 표식을 가리키며, 손가락으로 일어나 비키라 지시한다. 남학생이 놀라 얼른 일어난다. ‘거 자리 비어 있으면 앉을 수도 있지. 그리고 뭐 손가락으로 지시하고 그러나…’하고 생각하는데 자리가 생기자 이번에는 “어이. 앉어.”하고, 빈자리를 가리킨다. “아닙니다. 곧 내립니다. 어르신” 하니, “앉어. 인마” 한다. 학생은 “아닙니다.”하고 거절하더니, 쭈뼛쭈뼛 옆 칸으로 이동해 간다. 인천 가는 길에 마주친 마뜩잖은 상황.
# 5. 재수 없는 날
지하철 의자 끝, 기둥에 기대어 섰다. 먼 곳에 가는 중이라 빈자리를 찾아도 빈자리는 없고, 내 앞에 앉은 여자는 졸고 있는 걸 보니, 금방 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은 점점 늘어나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있는데, 내 앞에서 졸던 여자가 두리번거리더니 후다닥 내린다. ‘아이고, 다행이다.’ 그 빈자리에 앉으려니, 옆에 앉았던 중년 남자가 잽싸게 그 자리로 옮긴다. 그래서 내 옆에 서 있던 아가씨가 그놈 빈자리에 앉는다. ‘이런, 씨… 뭐냐 이 상황은...?’
둘이 아는 사이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둘 다 내내 졸더니, 그 여자는 내리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다. 여러 다른 자리는 내리고 앉고, 계속 자리가 바뀌어도, 내 앞 남자는 계속 졸기만 한다. 결국, 내가 먼저 내렸다. 아… 재수 없는 날. 살면서 겪는 불상사가 어찌 이것뿐이랴.
# 6. 하지 말자
휴일 오후, 차창으로 흐르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예쁘장한 아가씨 내 앞에 서더니, 휴대폰을 꺼내 통화를 시작한다. 청량리에서 내리기까지 근 1시간을 친구와 수다를 떤다. 통화 중 ‘씨발’이 12번, ‘존나’가 17번, 내용이 거의 욕이다. 제발 공공장소에서 욕이나 큰 소리로 전화 좀 하지 말자. 지하철 전세 냈냐? 이것들아.
# 7. 사투리 옆 처자들
제주도 사투리. 한참을 엿듣다 재미있는 구절에 쿡 하고 웃었더니, 비밀이라도 들킨 듯,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알아점수과? (알아들으세요?)” "뭐랜 고람신지는 알아짐니다.(뭐라고 하시는지는 압니다.)" "어디 꽈? 서귀포? 제주시?(집이 어디신데요? 서귀포? 제주시?)""그냥 암니다게.(그냥 알아요.)" 다시 자기들끼리 수다 떨다, 내리기 전 나에게 "제주도 화이팅." 하고,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해맑은 젊음이 부럽다.
# 8. 반복 밤늦은 귀갓길 지하철. 반쯤은 졸고, 반쯤은 공허한 눈길로 창밖을 보고 있다. 퀴퀴한 술 냄새, 생활에 찌든 모습도 같이 실어 나른다. 왜 매일 갔다 매일 되돌아올까? 젊었을 때는 자유롭게 방황하며 살고 싶었는데, 나이 드니 갈 곳도 없고, 매일 일상을 반복하며 세월만 깎는다. 또 그렇게 한 해가 간다.
#9. 세일즈맨
건너편에 앉았던 젊은 친구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나더니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팔기 시작한다. 어설프다. 여기저기 쿡쿡 웃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연극 할 때 기억이 났다.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로 남대문 시장에서 좌판을 펼쳤다. 오전 내내 호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혹시나 누가 알아볼까 봐 고개 푹 숙이던 추운 겨울날. 눈물 나는 아픈 젊음이 있었다.
반응이 시원치 않자, 다시 주섬주섬 집어넣는다. 불러 세워서 제일 값이 싼 손전등 하나 샀다. 내가 사니 여기저기 사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아 거 지하철 내에서는 물건 판매가 금지되어 있어요. 이번 역에 내리세요.” 어떻게 알았는지 역무원의 불호령에 허겁지겁 내리며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씩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얼결에 나도 ‘잘 사세요.’라며 손을 흔들었다. 싼 게 비지떡. 손전등은 금세 망가졌지만, 서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던 짧은 마주침이었다.
# 10. 종점
졸다가 종점에서 내렸다. 문산. 경의선 종착점.
예전엔 경성, 즉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달리는 철도였다. 시인 백석도, 윤동주도, 김소월도 타고 다니던 철도(鐵道)다. 지금은 갈 수가 없다. 사상이 막은 것이다.
자본주의고 공산주의를 떠나서 같은 말 쓰는 한민족인데 이 철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다음에는 졸다, “요기는 개성이야요. 내리실 분은 날래 내리시라요.” 안내 방송에 놀라 '아… 쌍. 개성까지 왔네'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기래야 고향 잃은 사람들 선물꾸러미 들고 꿈에도 기리던 고향집에 가 볼 거 아이가!’
혼자 운전해야 하는 젊은 지하철 운전자에게 “격무에 외롭지 않냐?” 물으니, 아무리 늦은 시간이나 첫새벽에도 신기하게 누군가는 반드시 타고 내린단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과 함께 가니 외롭지 않단다. 그에게 한 수 배웠다. 그래, 삶이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오래 타고 있던 직장이라는 기차에서 내렸다. 새로운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또 타야하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도 생기겠지. 그들과 잘 어울려서 내 삶의 종착역까지 아름다운 여행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