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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우리를 위하여

4장. 헨젤과 그레텔 - 빵 부스러기의 길 위에서

by 유혜성

4장. 헨젤과 그레텔 - 빵 부스러기의 길 위에서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낯선 숲 속에 던져진 적이 있다.

나무들이 서로의 그림자를 삼키고, 발밑의 길이 스르르 사라지던 순간.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방향을 잃고 서성이는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종종 어릴 적 읽었던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린다.


그땐 그 이야기가 너무 달콤했다.

쿠키로 만든 벽, 초콜릿 창문, 설탕 가루로 덮인 지붕.

배고픈 아이들이 과자집을 발견하던 그 장면은

마치 동화 속의 축복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책장을 넘기자,

그 달콤함이 얼마나 쓸쓸한 향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숲은 더 이상 초록빛 환상이 아니었다.

버려짐의 공포, 결핍의 냄새, 유혹의 단맛,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남고자 버티는 생의 의지가 섞인, 너무도 현실적인 숲.

나는 그때 깨달았다.

헨젤과 그레텔은 단지 길을 잃은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길을 ‘만드는’ 아이들이었다.


돌멩이를 주워 길을 남기고,

빵 부스러기를 흩뿌리며 기억의 흔적을 남긴다.

그 부스러기 하나하나는

‘나는 아직 여기 있어요’라는 절박한 신호이자,

세상에 던져진 한 인간의 존재 증명이다.


우리의 삶도 매일 그런 부스러기를 흩뿌리며 걷는 여정일지 모른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혹은 스스로의 기억 속에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조심스레 길 위에 무언가를 남긴다.


숲을 빠져나온 헨젤과 그레텔의 손끝에는

아직 따뜻한 부스러기의 온기가 남아 있다.

나도 그 손을 꼭 잡고 싶었다.

길을 잃어도, 서로의 체온으로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두려움의 동화가 아니라,

‘돌아오는 법’을 속삭이는 오래된 은유로 읽는다.

누구나 아는 줄거리, 그러나 낯선 이야기


우리는 모두 이 이야기를 안다고 믿는다.

가난한 나무꾼과 그 아내, 숲 속에 버려진 남매,

달빛에 반짝이는 돌멩이와 새들이 먹어버린 빵 부스러기,

과자로 지어진 집, 마녀의 덫, 그리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두 아이.

너무 익숙해서, 마치 오래된 꿈처럼 희미해진 이야기.


<헨젤과 그레텔>은 독일의 그림 형제가 1812년 처음 세상에 내놓은 동화다.

그림 형제는 민중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채집해,

인간의 본성과 시대의 그림자를 함께 담았다.

초판 속에서는 아이들을 숲에 버리는 인물이 ‘어머니’였지만, 1819년 개정판부터는 ‘계모’로 바뀌었다.

한 문장 속의 ‘모(母)’가 ‘계(繼)’로 바뀐 것뿐인데,

세상은 훨씬 안심한 듯했다.

그 작은 수정이, 우리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 밖으로 밀어냈는지를 보여준다.


어릴 적의 나는 이 이야기를 단순히 달콤한 판타지로만 읽었다.

마녀는 무섭고, 과자집은 달콤하고, 아이들은 영리하게 살아남는다. 그땐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다시 펼쳐 본 헨젤과 그레텔의 숲은 훨씬 더 깊고, 어둡고, 또 이상하게도 지금의 나와 닮아 있었다.


아이들이 숲 속에 버려졌을 때의 절망,

돌멩이를 주워 길을 남기던 헨젤의 조심스러운 손길,

빵 부스러기를 흩뿌리던 그레텔의 희미한 희망.

그 모든 장면이 나의 인생 한때와 겹쳐졌다.

나 역시 길을 잃은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부스러기’ 하나씩을 남겨 두었다.

“나는 아직 여기 있다.”

그 조용한 신호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이 자리로 데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결말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다.

그레텔이 마녀를 이기고, 오빠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건 생존 이상의 이야기, 귀환의 서사였다.

길을 잃어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

사라져도 다시 존재를 증명하려는 의지,

그것이 이 오래된 동화가 품고 있는 진짜 심장이다.


그래서 나는 <헨젤과 그레텔>을

두려움의 이야기가 아니라,

‘돌아오는 용기’를 가르쳐주는 이야기로 읽는다.

숲은 언제나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붙잡고 길을 만든다.

돌멩이와 빵 부스러기로, 서로의 온기를 기억하며.

과자의 집 - 달콤함 속의 덫


과자의 집은 언제 봐도 유혹적이다.

쿠키로 된 지붕, 설탕으로 만든 창문, 초콜릿 향이 나는 벽.

햇살 아래 반짝이는 그 집은 마치 천국의 문처럼 달콤하지만, 그 안에는 오븐의 불길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왜 늘 이런 달콤한 덫 앞에서 무너질까.

어쩌면 그것은 결핍의 기억 때문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가 아이들을 숲에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결국 ‘없음’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버릴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

결핍은 그렇게 잔인하게 사랑을 시험한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결핍의 얼굴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이제 우리는 빵 대신 인정과 성취,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산다.

그래서 “한 번만 클릭하세요”, “이 기회를 놓치면 인생이 바뀝니다” 같은 문장에 마음을 내어준다.

그 모든 것이 현대판 ‘마녀의 속삭임’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진짜 위험은 쓴맛이 아니라 달콤함이라는 것을.

쓴 현실은 우리를 경계하게 만들지만,

달콤한 유혹은 마음의 방심을 허락한다.

헨젤과 그레텔이 그 앞에서 무너졌듯,

우리도 유혹 앞에서는 언제든 아이가 된다.


그러나 아이가 된다는 건 완전히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반응하기에,

우리는 다시금 진짜 단맛과 가짜 단맛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그 깨달음이 바로 성장의 시작이다.


그레텔의 불 - 두려움 속의 주체성


이야기를 바꾼 건 결국 그레텔이었다.

헨젤의 지혜와 계획이 길을 열었다면,

마녀를 오븐에 밀어 넣은 것은 그레텔의 결단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오래도록 사랑한다.


그레텔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떠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행동하는 인간으로 변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순간을 ‘행동화(behavioral activation)’라고 부른다.

미국 임상심리학자 피터 루인슨(Peter Lewinsohn)이 제시한 개념으로,

두려움이나 무기력에 갇혔을 때,

생각보다 ‘작은 행동 하나’가 감정 전체를 바꾸는 힘이 된다는 뜻이다.


그레텔은 바로 그 행동을 선택했다.

오빠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아직 살아갈 내일을 위해, 불을 켰다.


그 불은 단지 마녀를 태운 불이 아니었다.

자신을 잃었던 어둠을 밝히고,

존엄과 자유를 되찾게 한 불이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 책임은 평화로울 때가 아니라, 공포의 순간에 깨어난다.”


그의 말은,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거나 지킬 때,

그건 마음이 편할 때가 아니라 두려운 순간에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레텔이 바로 그랬다.

겁에 질리면서도 오빠를 위해 행동했고,

자신도 살고자 불을 켰다.


그레텔의 불은 단지 마녀를 태운 불이 아니었다.

그건 두려움을 뚫고 사랑을 실천한 인간의 불빛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타인을 지키려는 용기,

그리고 함께 살아남고자 하는 연대의 마음이다.


두려움 속에서도 움직인다는 것,

그건 용기를 넘어, 사랑이 책임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그레텔의 불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두려움과 화해해야 누군가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요? “

귀환 - 보석과 재회


헨젤과 그레텔은 결국 보석을 품고 집으로 돌아온다.

가난했던 집은 다시 빛을 찾고, 계모는 사라지며, 아버지만 남는다.

이 결말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들이 가져온 보석은 재물이 아니라,

길을 잃고, 유혹을 견디고, 두려움을 뚫고 얻은 내면의 광채였다.

그레텔은 용기를, 헨젤은 신중함을 배웠다.

그들의 귀환은 되돌아감이 아니라 성장한 복귀였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돌아온다는 건 단순히 원래의 자리로 가는 게 아니라,

다른 눈으로 같은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한 번의 길 잃음은 우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돌멩이와 부스러기, 두려움과 결단,

그것이 결국 우리 인생의 보석들이다.


나의 이야기 - 숲 속에서 배운 것


나에게도 헨젤과 그레텔의 숲이 있었다.

단단한 돌멩이 대신, 빵 부스러기에 의지하다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달콤해 보이는 제안을 덥석 물고 스스로를 가둔 순간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구해 준 건,

내 곁에서 불을 지펴준 작은 ‘그레텔들’이었다.

누군가는 조언으로,

누군가는 단호한 한마디로,

나의 어둠 속에서 불빛이 되어 주었다.


돌아보면, 나는 헨젤이기도 했고, 그레텔이기도 했다.

길을 표시하는 사람, 불을 켜는 사람.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의 길 위에

작은 돌멩이를 흩뿌려 주는 조력자가 되고 싶다.


숲에서 배운 윤리는 단순하다.

살아남은 사람은, 누군가의 길을 밝혀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책임’이고,

책임이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오늘의 해석 - 왜 나는 헨젤과 그레텔을 사랑하는가


나는 헨젤과 그레텔을 사랑한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약함 속의 지혜, 두려움 속의 용기였다.


이야기는 말한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한 얼굴을 하고,

길은 언제든 지워질 수 있다고.

그러나 돌멩이를 흩뿌린 습관,

불 앞에서 결단한 작은 손길이

결국 우리를 살린다고.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이야기다.

시대만 다를 뿐, 우리는 여전히 숲 속에 서 있다.

여전히 길을 잃고,

여전히 달콤한 유혹 앞에서 흔들리고,

여전히 두려움과 싸운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속의 작은 그레텔이 불을 켜고,

헨젤이 돌멩이를 흩뿌린다.


그것이 인간의 회복력이고, 사랑의 형식이다.

서로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

함께 돌아가려는 그 손끝의 온기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헨젤과 그레텔을 사랑한다.

그들의 약함과 두려움, 그 속에서 피어난 용기,

그리고 서로의 곁을 끝까지 지켜준 연대를 사랑한다.


그들의 여정은 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 귀환록이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여정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함께 나누는 작은 질문

이야기를 덮고 나면, 우리는 각자의 숲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숲에서 당신은 어떤 길을 걸었나요?


• 당신의 삶 속 ‘과자의 집’은 무엇이었나요?

• 달콤했지만 위험했던 순간, 그 앞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했나요?

• 그리고 그때, 당신 곁의 ‘그레텔’은 누구였나요?


짧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고백 하나가 또 다른 누군가의 길을 밝혀 줄 작은 불빛이 될지 모릅니다.


한 줄 메모

“달콤하고 거대한 유혹 앞에서도,

우리를 지켜주는 건 작고 따뜻한 용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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