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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우리를 위하여

6장 행복한 왕자 - 제비와 함께한 눈물의 빛

by 유혜성

6장 행복한 왕자 - 제비와 함께한 눈물의 빛


금빛 동상과 아주 작은 날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 〈행복한 왕자〉.

하지만 우리는 그 동화를 정말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을까?


금빛으로 뒤덮인 동상, 보석이 박힌 눈, 그리고 차가운 하늘 아래서 날갯짓하던 작은 제비.

어린 시절엔 그저 슬픈 이야기로만 기억했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마주한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문장은 이상하리만큼 반짝인다.


그는 이 짧은 동화 속에 ‘아름다움’과 ‘연민’이 서로를 구원하는 장면을 숨겨두었다.

눈물로 녹슬어버린 왕자의 마음, 그리고 그 곁을 끝까지 지킨 제비의 날개.

그 빛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조용히 세상을 바꾸는지, 이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오스카 와일드, 아름다움에서 연민으로


1888년,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는 동화집 <행복한 왕자와 다른 이야기들>(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을 세상에 내놓았다. ¹

그는 미(美)와 예술을 숭배하던 시대의 대표적 미학파(Aestheticism) 작가였지만, 이 작품만큼은 달랐다.

화려한 언변 대신 ‘눈물’을 택했고, 냉소 대신 ‘연민’을 이야기했다.


1880년대의 런던은 산업혁명 이후, 화려함과 빈곤이 공존하던 도시였다.

그 속에서 와일드는 금빛 왕자의 동상을 세우고, 그 곁에 아주 작은 제비 한 마리를 앉혔다.

겉으로는 동화였지만, 실은 사회적 양심을 가장 조용히 드러낸 고백이었다.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이 작품이 ‘착한 동화’로만 읽혀 왔다.

“왕자는 착하고, 제비는 불쌍하다.”

그러나 원전 속 와일드는 훨씬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그는 아름다움이란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눈에서 시작된다고 믿었고,

그 연민이 몸을 얻는 순간,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줄거리 - 뜻과 몸이 만날 때


살아 있을 때, 왕자는 궁전의 높은 담장 안에서만 살았다.

그는 세상의 슬픔을 본 적이 없었다.

찬란한 조명과 음악 속에서, 자신이 정말 ‘행복한 왕자’라 믿었다.


그러나 죽은 뒤, 그는 도시 한가운데 세워진 금빛 동상이 되었다.

하늘 가까이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전혀 달랐다.

그 아래에는 굶주린 어머니의 품에 매달린 아이,

새벽까지 불을 밝히는 노동자,

그리고 차가운 거리에서 몸을 웅크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제야 왕자는 처음으로 세상의 눈물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돌로 굳은 몸이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던 작은 제비 한 마리가 그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왕자는 간절히 부탁했다.

“내 금박을 벗겨 저 가난한 이에게 주렴.

내 칼자루의 루비를, 내 눈의 사파이어를 빼어 저 아이에게 건네주렴.”


떠나야 할 제비는 망설였지만, 결국 그 부탁을 들어준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왕자의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지고, 제비의 몸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겨울이 깊어지자 왕자는 모든 장식을 잃고,

제비는 마지막 숨을 내쉬며 왕자의 어깨 위에서 눈을 감는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행복한 왕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세상 가장 고요한 사랑의 형상이었다.


사람들은 쓸모없어진 동상을 녹여 버렸지만,

하늘은 그들의 마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 부르며

왕자와 제비를 함께 거두었다.

새로 읽기 - 연민이 몸을 얻을 때


왕자의 이야기는 책에서 끝났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이어진다. 그가 흘린 눈물은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감정으로 남아, 지금도 우리 마음 어딘가를 적시고 있기 때문이다.


왕자는 ‘뜻’이고, 제비는 ‘몸’이다.

뜻만 있고 몸이 없으면 마음은 제자리에서 멈추고,

몸만 있고 뜻이 없으면 발길은 방향을 잃는다.


둘이 만날 때, 사랑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생각 속 따뜻함이 손끝의 행동으로 옮겨오는 그 순간,

사랑은 머무르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


뜻이 몸을 만나면, 연민은 움직임이 되고, 사랑은 현실이 된다

.

우리의 하루도 다르지 않다.

마음이 아파도 아무 말 못 한 날이 있고,

누군가의 고통을 느끼지만 바쁨에 묻혀 지나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제비처럼 작은 용기 하나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짧은 문자 한 통,

혹은 어깨 위에 살짝 얹는 손길 하나.


그건 대단한 기적이 아니라,

연민이 몸을 얻어 세상에 닿는 순간이다.

와일드는 그 찰나를 ‘행복’이라 불렀다.

눈부신 금빛이 모두 벗겨져도, 사랑은 녹지 않는다는 걸,

왕자와 제비가 함께 증명해 보였다.


제비의 윤리 - 크지 않아도, 늦지 않아도


제비는 화려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는다.

남쪽으로 날아가야 할 일정표를 접어 두고, 눈앞의 한 사람을 돕는다.

찬란한 말보다, 지금 이 자리의 체온을 나누는 행동이 더 진짜라는 걸 아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비의 윤리는 웅장하지 않다.

크게 외치지 않고, 말보다 행동으로, 하루의 몸짓으로 실천한다.

그는 하늘을 가로지르기보다 도시의 틈새를 돌며,

하루 한 번의 날갯짓으로 누군가의 방에 불을 켠다.

그 작은 불빛 하나가 세상의 온도를 바꾸고,

그 온기가 모여 도시의 겨울을 조금 덜 차갑게 만든다.


왕자의 금빛은 체면과 명예의 상징이었다.

겉의 금빛이 벗겨질수록, 그 안의 진심이 드러났다.

보석 같은 눈은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이었고,

그 시선을 나누어 줄 때, 비로소 다른 이들이 세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선 왕자는 세상을 내려다볼 수는 있었어도,

손을 내밀어 감싸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낮게 나는 제비가 필요했다.


진짜 따뜻함은 그냥 오지 않는다.

언제나 한 번의 추위를 지나야 비로소 우리 곁에 머문다.

따뜻함은 누가 건네주는 선물이 아니라,

스스로 버텨낸 시간 끝에 찾아오는 온기다.

작지만 단단한 날개들


우리는 모두 왕자처럼 살 수는 없다.

도시의 모든 금박을 벗겨내어 세상을 구원할 순 없다.

그러나 제비가 될 수는 있다.

거대한 구조를 바꾸지 못해도, 누군가의 겨울을 덜어 줄 실천은 가능하다.


큰 기부가 아니어도,

매월의 작은 후원이나 하루의 봉사는 제비의 날갯짓이다.

말로만 공감하지 않고,

한 번의 방문과 한 통의 전화로 마음을 건네는 일,

그것이 바로 제비의 윤리다.


사회는 이 작은 날개들의 기류로 움직인다.

누군가의 방 안에 불빛이 켜질 때, 세상은 조금씩 따뜻해진다.

거대한 담론보다 미세한 온도의 변화가 계절을 바꾼다.


나도 한때 ‘행복한 왕자’처럼 마음속 연민에만 머물던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들으면 오래 마음에 담았지만,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가까운 친구의 이사를 돕게 되었다.

무거운 상자를 옮기며 손에 굳은살이 잡히던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속의 무력감이 사라졌다.

그건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내 마음이 현실로 움직인 첫 경험이었다.

연민이 근육을 얻고, 생각이 행동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안의 왕자와 제비를 함께 부른다.

보고만 있지 않고, 작은 일이라도 직접 움직인다.

그게 내가 배운 ‘행복의 방식’이다.


나는 그래서 ‘행복한 왕자’의 제비를 사랑한다.


그는 작고 약했지만, 뜻에 날개를 내어 준 용기의 존재였다.

그 작은 날갯짓이야말로, 세상의 가장 무거운 눈물을 움직였다.

왕자의 마음이 제비의 몸을 얻었을 때,

연민은 비로소 현실이 되고, 온도가 되었다.


그 겨울, 제비는 얼어 죽었지만

그의 몸이 남긴 온기는 도시의 골목마다 번져 있었다.

따뜻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연민이, 다른 누군가의 손끝으로 옮겨질 때.


연민의 눈, 실천의 날개


오늘도 도시 어딘가에는 그런 제비들이 산다.

쪽방촌에서 무료 급식을 나누는 손길,

휴일을 반납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멘토,

거리의 버려진 동물을 돌보는 이웃들.

그들은 금빛 껍질은 없지만,

행복한 왕자의 눈을 대신해 세상의 고통을 본다.

그리고 제비처럼 작은 손과 날개로 그 고통을 덜어낸다.


시민의 현장에도, 일상의 구석에도 제비는 있다.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기후 위기 앞에서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서명하고 모금하는 이들.

세상의 변화는 언제나 이렇게 미세한 날갯짓에서 시작된다.

왕자의 눈물이 세상을 적시려면,

누군가의 날개가 먼저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도 제비는 있다.

병상에 누운 가족 곁을 밤새 지키는 손,

힘든 친구에게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라고 말해 주는 목소리,

하루의 피곤을 무릅쓰고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부모의 눈빛.

이 모든 것이 제비의 윤리다.

크지 않아도, 늦지 않아도,

그 실천은 누군가의 밤을 덜 춥게 만든다.


행복한 왕자는 우리 마음속의 연민과 이상이고,

제비는 그 이상을 현실로 옮기는 용기와 실천이다.

연민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세상은 비로소 변한다.

우리는 모두 그 둘을 함께 품고 산다.

연민의 눈과 실천의 날개로.


때로는 내가 왕자가 되어 이상을 품고,

때로는 제비가 되어 바람을 일으킨다.

중요한 건, 둘이 함께 있을 때 사랑이 현실이 된다는 것.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할 때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날개를 펴고 있다.

함께 나누는 작은 질문


• 당신 곁에도 조용히 날아와 마음을 덥혀준 ‘작은 제비’가 있었나요?

• 혹은 당신이 누군가를 위해 날개를 펴 본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 이야기를 댓글로 나눠 주세요.

당신의 한 문장이 또 다른 누군가의 겨울에 따뜻한 바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한 줄 메모

“연민이 눈을 열고, 실천이 날개를 펼 때, 세상은 비로소 따뜻해진다.”



참고 문헌

1. 오스카 와일드, 『행복한 왕자와 다른 이야기들』, 김석희 옮김, 문예출판사, 2008.

2. 정여울, 『내가 사랑한 작가들 1 – 오스카 와일드』, 민음사, 2015.

3. 이상섭,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에 나타난 사회비판적 성격」, 『영미문학연구』 제38집, 한국영미문학회, 2009.

4. 박경숙, 「〈행복한 왕자〉의 미학과 윤리」, 『영미문학논집』 제28권 2호, 2013.

5. 김서령, 『동화의 심리학』, 북하우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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