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러브를 사랑해-사랑을 계속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이 끝났다고 말해본 적이 있다.
메신저 창을 닫으면서,
연락처를 지우면서,
“이제 진짜 끝이야”라고 마음속으로 선언해 본 순간들.
하지만 정말 그 지점에서
사랑이 완전히 사라졌을까?
설령 관계는 끝났다고 해도,
그 사랑이란 감정이
우리 인생에서 다시는 돌아오지는 않는 걸까?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보면,
사랑은 “이제 끝이야”라고 선언한 뒤에도
한참 동안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드디어 사귀게 되면, 이제 사랑은 완성된 거야.”
마치 연애 시작 = 결승선 통과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살아보니, 사랑은 결승선이 아니라
그제야 시작되는 ‘길’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쳐 말하고 싶다.
사랑이란, 결국 감정의 종착지가 아니다.
그건 계속 사랑하려는 마음의 연습이다.
한 번 “사랑해”라고 말하는 건 어렵지만,
진짜 어려운 건 그 말을 며칠, 몇 년, 몇십 년 동안
조금씩 다른 온도로 계속 말하는 것이다.
조금 서운한 날에도,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날에도,
그래도 이 사람 곁에 있고 싶다고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는 그 연습.
사랑은 그 연습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 위에서만
조용히, 그리고 깊게 자란다.
나는 여전히 이 문장을 믿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좋아함(Like)”을 공부했다.
좋아함이 어떻게 관계의 온도를 데우는지,
몸의 리듬과 마음의 리듬이
어떻게 서로를 살려내는지 함께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 장에서,
나는 이렇게 조용히 묻고 싶다.
나는 아직도 사랑을 하고 싶을까?
그리고,
그 사랑을 사랑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사랑이 무서워요.”
그 말 뒤에는 보통 이런 마음이 숨어 있다.
• 상처를 다시 받으면 어쩌지?
• 예전처럼 무너지면 어떡하지?
• 이번엔 정말 버틸 자신이 없는데…
그러니까 사실 무서운 건 ‘사랑’이 아니라 ‘다시 아플까 봐’다.
파울로 코엘료는 소설 <브리다>에서
사랑의 길을 걸으면
언젠가는 상실과 고통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¹
그걸 완전히 피하는 방법은 단 하나,
처음부터 사랑의 길을 걷지 않는 것뿐이라고.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그 말은 이런 뜻이기도 하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세상과의 모든 깊은 관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
그건 너무 큰 대가다.
상처를 막는 대신, 삶의 온도 전체를 낮추어 버리는 선택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을 두려워하지 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결국 더 큰 상처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상처는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상처보다,
다시는 사랑해 보지 못한 채
내 마음을 끝내 열어보지 못한 상처에 가깝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관계의 용기다.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은
사랑만 믿는 게 아니라,
삶의 회복력을 믿는 사람이다.
긍정정서 연구자 바버라 프레드릭슨은 ²
우리 마음의 “좋은 감정들”이
생각의 폭을 넓히고,
행동의 가능성을 늘려준다고 말했다.
그녀는 특히 사랑을
“우리 감정 중 가장 깊고 폭넓게 확장되는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²
왜냐하면 사랑은 한 번의 폭발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교감들이 반복되며 쌓이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잠깐 떠올려 보자.
• 아침에 도착한 짧은 안부 메시지
• 퇴근이 늦은 날, 누군가가 말없이 데워 건네는 따뜻한 밥 한 그릇
• 피곤한 얼굴을 보자마자 묻는 “오늘 힘들었지?”라는 목소리
이런 조용한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우리는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아, 이 사람과의 사랑은
큰 이벤트가 아니라 작은 누적의 역사였구나.”
사랑은 ‘처음’보다 ‘다시’에서 강해진다.
네가 나를 실망시킨 뒤에도,
내가 너에게 짜증을 낸 뒤에도,
“그래도 우리, 한 번 더 해보자”라고 말하는 순간들.
사랑은 설레는 시작보다
지켜내는 반복에서 더 깊어진다.
우리가 상처를 견딜 수 있는 이유,
다시 마음을 열 수 있는 이유는
마음 안에 내재된 감정의 회복 탄력성 덕분이다.
그리고 그 탄력성을 가장 크게 깨우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²
오래 다니던 회원 한 분이
수업이 끝난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전 남자친구랑 찍은 사진을 아직 못 지웠어요.
미련이 남아서라기보다…
그 시절의 저를 통째로 지우는 것 같아서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때의 당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사랑은 때로 ‘누구’를 붙드는 일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를 놓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도
그 시절의 나까지 한꺼번에 지울 순 없다.
• 연락처 하나를 지우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나를 완전히 없애고 싶지 않아서일 수 있고,
• 사진 몇 장을 남겨두는 건 미련이 아니라
그때의 내가 버티던 방식,
내가 살아낸 흔적을 지키려는 마음일 수 있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반드시 두 사람이 남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랑은, 결국 한 사람만 남긴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아직 잘 살아보려는 지금의 나”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³
작은 맛과 향기가
아주 오래된 기억을 한꺼번에 깨운다고 썼다.
차 한 모금, 빵 한 조각,
어떤 오후의 공기 냄새 하나가
과거의 시간 전체를 다시 불러오는 장면들.
사랑도 그렇다.
헤어진 지 오래되어도
어느 카페의 조명,
어느 계절의 바람만으로
갑자기 그 시절의 내가
통째로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 기억 속 중심에 있는 건
“그 사람”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때의 불안하고도 반짝이던 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사랑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저 다른 형태로 남아 머문다.
어떤 사랑은 사람으로 남고,
어떤 사랑은 기억으로 남고,
어떤 사랑은
“그래도 나는 나를 더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남는다.
오래된 사랑은
‘누구와의 사랑’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를 이해하게 해주는 이야기로 바뀌어 남는다.
“요즘은 설레진 않아요.”
결혼 20년 차라는 회원이
웃으면서도, 조금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에 있던 남편이 툭 한 마디를 보탰다.
“괜찮아. 그대가 내 옆에 있으면
이미 안정 모드잖아.”
둘은 눈을 마주 보고 웃었다.
예전 같지 않다고 해서
끝난 건 아니다.
연애 초반의 사랑은
불꽃처럼 번쩍 타오르는 힘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서서히 알게 된다.
• 불꽃은 순간을 밝히지만,
• 온기는 시간을 데운다는 것을.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⁴
사랑을 “느낌”이 아니라
배워야 할 기술이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법,
싸운 뒤에도 돌아오는 법,
서로의 다름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조율해 가는 법.
우리가 연습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할수록
사랑은 감정에서 습관과 태도로 옮겨 간다.
사랑이란 결국,
불꽃이 아니라 불씨를 다루는 기술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⁵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있음”으로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누군가의 품에서, 눈빛에서,
얼굴 표정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랑은
“둘이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다시 보는 일”이기도 하다.
• 너를 통해 내가 더 잘 보이고,
• 나를 통해 네가 더 깊어지는 상태.
나는 이걸
“함께 있음의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을 사랑한다는 건,
서로의 존재 방식을 존중하는
아주 윤리적인 선택이다.
그건 소유가 아니라
공존에 대한 합의이고,
운명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 이어진 결과다.
알베르 카뮈는⁶
인간을 버티게 하는 건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그래도 함께 살아가 보려는 의지”라고 말한다.
관계 안에는 언제나
조금의 갈등, 오해, 오차가 끼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래도 너랑 같이 이 모르는 길을
한 번 더 걸어볼까?”
라고 말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함께 들어 있다.
사랑을 계속 선택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희망을 거는 동시에,
미래에도 여전히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작은 믿음을 거는 사람이다.
한 노부인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린 평생 싸웠어요.
사소한 걸로 매일 티격태격했죠.”
나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평생을 같이 사셨어요?”
그녀는 잠시 창밖을 보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매일 밤엔 꼭 말했어요.
‘내일 아침에 또 보자.’
그게 우리 사랑의 방식이었죠.”
그 문장 하나가
두 사람을 평생 이어 준 약속 같았다.
사랑이 위대한 건,
극적인 장면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매일 조금씩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사랑을 사랑한다는 건
마음속에서만 묵상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늘 하루에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연습이어야 한다.
오늘, 아주 작은 노트를 꺼내
이렇게 세 가지를 적어보자.
1. 지금 내 사랑의 모양 적어보기
“내 사랑은 지금 어떤 상태일까?”
• 활활 타오르는 불꽃인지,
• 조용히 살아 있는 불씨인지,
• 한때 뜨거웠지만
지금은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따뜻한 잔열인지.
솔직하게 적어도 된다.
“요즘은 사랑이 좀 무섭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해도 괜찮다.
2.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내가 배운 것 세 가지
이별이든, 계속 이어지는 관계든 상관없이,
사랑을 통해 내가 배운 것들을 적어본다.
• 나를 더 잘 돌보는 법
• 참지 말고 말해야 할 타이밍
• 끝났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끝난 게 아니었다는 깨달음…
상처만큼이나
나를 단단하게 만든 것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3. 사랑을 다시 믿게 하는 나만의 문장 한 줄
예를 들어,
• “그래도, 나는 사랑을 사랑한다.”
• “한 번 다쳤다고, 영원히 ‘닫히진’ 않겠다.”
•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아,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이 세 줄만 써도
당신 안의 사랑은
다시 언어를 얻기 시작한다.
사랑은 다시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
서툴게 “좋아해”라고 말하던 순간에서 시작해
“내일도 같이 있을래?”
“오늘 하루도 함께여서 고마워.” 같은 문장으로 자라난다.
사랑의 언어를 믿는 사람은
삶도, 사람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완전히 외롭지 않다.
그 마음 안엔 언제나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Like에서 Love로,
Love에서 ‘Love를 사랑해’까지
한 장 한 장 마음의 속도를 맞추며 함께 걸어왔다.
좋아함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사랑은 우리의 일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 시간을 거치며
우리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아직도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랑을 사랑하고 있을까?”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 질문에 아주 조용하게 답하고 싶다.
사랑은 나를 완성시키진 않지만,
나를 계속 살아보게 만드는 힘이었다.
누군가를 만났던 시간도,
놓아주었던 순간도,
다시 손을 내밀었던 날들도
결국은 모두
내 안의 사랑을 다시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랑이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이 다른 모습으로,
다른 계절로,
다른 온도로 나를 지나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 지나간 사랑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그건 버려진 것이 아니라
내가 조금씩 더 넓어진 것일 테니까.
책을 덮는 순간
당신 마음에도 이런 문장이
조용히 내려앉았으면 한다.
“그래, 나도… 러브를 사랑해.”
참고 문헌
¹ 파울로 코엘료, 『브리다』, 권미선 옮김, 문학동네, 2010.
² 바버라 프레드릭슨, 『긍정의 발견: 긍정과 부정의 3:1 황금비율』, 최소영 옮김, 21세기 북스, 2009.
³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9–.
⁴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정영목 옮김, 청미래, 2007.
⁵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 개정판 2025.
⁶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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