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다 낫게 해 줄게
한 달이 지나도록 코로나 후유증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딱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나아질 때까지 절대 안정만 취하라는 말만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오래가는 병으로 인해 더 심해진 공황장애로 오히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빨리 시들해져 갔다. 화장실 갈 힘조차 없는데 나를 위해 무엇을 챙겨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남편이 있었지만 갑자기 하루아침에 일도 못 가고 코로나 후유증이라며 집에 드러누워있는 아내가 걱정이 되면서도 원망 역시 늘어갔을 것이다.
아픈 딸에게 멀리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엄마는 오늘이라도 당장 한국으로 오라고 성화였다. 한국에는 코로나 후유증 환자를 위한 특별 클리닉 센터 등이 있어 확실히 미국보다는 더욱더 관심 있게 환자들을 돌봐 주는 듯했다. 하지만 내 생활은 모두 미국에 있는데 정말 이런 것 때문에 남편과 일을 제쳐두고 한국을 가야 하는 걸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러 어느 저녁, 당장이라도 병원에 가지 않으면 숨이 안 쉬어져 죽을 것 같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도 놀래서 그랬을까? 집에 오자마자 큰 화를 내며 더 이상 이렇게는 아픈 나와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모두들 며칠 혹은 길어봤자 일주일이면 회복하는 코로나로 내가 유난히 엄살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아니면 자기 혼자 일을 나가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 억울했던 것일까? 그도 사람이기에 어느 쪽이던 이렇게 아픈 아내와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드는 것 자체는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아무런 연고도 가족도 없는 이곳에서 버틸 이유가 없었다.
한국을 가자. 죽더라도 엄마 옆에서 죽자.
그날로 바로 나는 한국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나는 평소에도 예기불안이 심해 매년 타는 비행기도 탈 때마다 힘들어하곤 했다. 하지만 어차피 죽으러 한국을 가는데 비행기에서 공황발작이 또 일어난다 한들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오히려 담담히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 검색대를 걸어서 통과할 힘이 없어 난생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 나는 특수 휠체어 전문가였는데 내가 막상 탈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휠체어를 타고 도착장에서 나오는 나를 봤을 때 엄마 아빠 마음은 어땠을까? 하지만 엄마는 속상한 기색 하나 없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이제 왔으니 됐어. 아무런 걱정 하지 마. 엄마가 너 다 낫게 해 줄 거야”.
엄마는 죽과 과일과 내가 먹을만한 것들을 잔뜩 싸왔다. 인천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아빠 차 안에서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먹은 것보다 더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왠지 죽으러 왔지만 죽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처음으로 긍정적인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