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남편, 그래도 내편

남편에게 상처받고 위로받고

by 유쾌한 주용씨

"후루룩 쩝쩝 후루룩 쩝쩝"


귀를 막고 싶다. 소리가 너무 크다. 남편이 늦은 아침을 먹는 소리다. 지독한 소음이다. 남편은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와 11시가 넘도록 늦잠을 잤다. 지방에서 오랜만에 올라온 시동생은 밤새 친구와 술을 마시고 아침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두 아들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을 것이다.


휴일이니 나도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지만 깨보니 새벽 5시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어제 읽던 책을 조금 읽었다. 샤워를 하고 앞치마를 두른다. 어제 시장 봐온 식재료를 꺼냈다. 닭을 손질하고, 물오징어를 다듬고, 조기의 비늘을 긁고 씻어 채반에 널었다.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인지 배가 고프다. 전기밥솥에 밥이 조금 남아있다. 물김치 건더기에 고추장을 넣어 쓱쓱 비벼 먹었다.


식구들이 깨기 전에 아침을 준비해야지 하는데 설거리 거리가 한가득이다. 어젯밤 아들들이 끓여먹은 짜파게티 묻은 냄비와 대접들이 쌓여있다. 설거지를 하는데 다리가 저려온다. 오전 내내 씽크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설거지 끝내고 좀 앉아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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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그제야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온다. 퉁퉁 부은 남편의 얼굴이 밉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겠다 싶어 설거지에 집중한다. 화장실에 들어간 남편의 소리에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다.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게 살짝 열려 있던 욕실 문을 꽉 밀어 꼭 닫는다.


어제 과음한 남편과 시동생이 먹을 북어국을 준비한다. 다시마, 멸치, 무를 넣고 육수를 끓이는데 이번엔 큰아들이 나온다. 눈을 비비며 아침 반찬이 뭐냐 한다. 고3 아들에게 짜증을 낼 수 없는 엄마는 "금방 준비해줄게. 갈비찜 남은 거 주려구. 아, 돈까스도 남았는데 먹을래?"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큰아들의 기름진 아침을 차린다. 스터디카페에 가야 하는 고3 큰아들의 밥이 항상 1순위다.


북어국을 끓여 남편의 아침을 차린다. "후루룩 쩝접"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남편은 북어국을 두 그릇이나 마셔댄다. 눈치 없는 남편, 내 옆에 와 "북어국, 진짜 잘 먹었다. 속이 확 풀리네. 꺼억~"한다. 남편은 밥 먹는 소리가 유독 크다. 아니, 남편이 내는 모든 생리적 소리가 내 귀엔 크다.


오전 내내 주방일로 힘들어서인지, 집안에 있는 네 남자의 게으름이 답답해서인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한 채 집안일에만 매달리고 있는 내 꼴이 싫어서인지 집안에 있기가 답답했다. 작은아들과 시동생이 먹을 아침, 아니 점심을 준비해놓고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공부를 하러 가는 고3 아들은 1시간째 몸치장 중이다. 느긋한 그 모습도 보기 싫다.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노트북과 책을 가방에 넣는 날 보며 직접 어디 가냐고 묻지도 않는다.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내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그제야 눈치 챈 모양이다. 큰아들이 묻는다. "엄마, 어디 가?" 화를 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냥 잠깐 바람 좀 쐬고 오려고." 남편은 내 외출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듯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다.


신혼 초엔 내 기분을 알려고 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서운하고 화가 났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편하다. 상대방이 지극히 감정적인 상태일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뒤늦게 깨달은 거고 남편은 원래 다른 사람의 감정을 궁금해 하지도 깊게 관여하지 않는다. 아내인 나도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이다. 나의 불편한 감정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남편이다. 그러니 내가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는 게 남편을 편하게 해주는 배려인지도 모른다.


스타벅스에 가서 한달에 한 잔 마실 수 있는 통신사 무료 커피를 주문한다. 구석에 앉아 소설책을 읽는다. 전에는 마음이 복잡할 때 그 감정에만 매달려 있었는데 이젠 다른 일을 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특히 소설책을 읽으면 복잡한 마음이 이야기 속으로 옮아간다. 단편 소설 하나를 읽고나니 수다를 떨고 싶다. 노트북을 켜고 오늘의 나를 쏟아낸다.


'후루룩 쩝쩝' 소리가 너무 싫었다고, 집안일은 정말 한도끝도 없다고, 남자만 있는 집에서 여자 혼자는 너무 외롭다고, 다음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면 남자로 태어나거나 결혼하지 않겠다고... 글로 수다를 떨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생각한다. '식구들 저녁은 또 뭘 해 주나?'




남편의 말 한 마디에 아직도 상처를 받는다


초저녁부터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랑이 인형과 함께 잠을 청했다. 난 아프다. 감기몸살에 가벼운 우울증에 무기력증까지 아무튼 이틀 동안 내 상태가 정상은 아니다. 저녁 먹고 늦게 온다는 남편의 카톡이 반갑기도 했다. 두 아들 저녁 챙겨 먹이고 학원 보내고 나면 혼자 일찍 쉴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그날 본 영화 <비포 선셋>을 떠올리니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눈빛이 간절해졌다. 나의 좋지 않은 몸 상태와 먼저 자겠다는 내용의 카톡을 남편에게 보냈다. "푹 쉬어"라는 짧은 답문이 왔다. 늦게 오더라도 몸살약 하나쯤 들고 오려나, 열이 있는지 내 이마 한번 짚어주려나 하는 생각들을 하다 잠이 들었다.


진짜 아픈 사람처럼 중간중간 나의 '끙끙' 앓는 소리에 잠에서 깨기도 했다. 막내가 학원에서 왔다. 차가운 손으로 내 어깨를 짚으며 "엄마, 나 왔어. 울엄마 자는구나? 푹 자~" 한다. 참 다정한 아이다. 다시 잠이 들었다. 남편이 오는 소리, 막내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 다시 까무룩 잠 속으로...


몸을 뒤척이다 손으로 옆에 누워 있던 남편의 어깨를 쳤나보다. "왜 사람을 쳐!?" 뒤돌아 등을 보이고 있던 남편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내 맘에 생채기를 냈다. "미안! 옆에 있는지 몰랐어.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정말이다. 일부러 친 게 아니다. 그런 반응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잘까 하는데 남편이 괘씸하다.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냐?"하며 이불장에서 이불을 챙겨 나왔다.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청해 보지만 이미 잠은 달아나버린 상태다.


예상했던 대로 남편은 나와 보지도 않고 좀 있으니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또 저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렇겠지. 난 오늘 또 이러다 말겠지. 갱년기 여자가 되기로 작정하니 아주 사소한 일들이 아픈 상처가 되기도 한다. <비포 선셋>의 제시와 같은 시선이라면 약이 되었을 텐데... 내 이번 생애에 이런 낭만적인 눈빛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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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아침에 일어나보니 내 노트북 옆에 약상자가 놓여 있다. 남편이 어젯밤에 사 온 것이다. 어젯밤의 내 상처와 슬픔이 멋쩍어 황당해하고 있는데 잠에서 깬 남편, 다정한 목소리로 "아침저녁으로 한 알씩 먹으면 된대. 내가 좀 알아보고 사 왔어." 한다.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알았어, 고마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제까지 미운 남편이었는데 하루만에 내편이 되었다.


인생은 드라마다. 오해와 갈등도 있고 이렇게 반전도 기다리고 있다. 남편이 사다 준 갱년기 약으로 잠도 푹 자고 우울한 기분도 나아졌으면 좋겠다. 아주 사소한 일들이 삶의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의 자연스러운 굴곡이다. 다행스러운 건 살아갈수록 남편이 미운 날보다 내편이라 편안하고 든든한 날이 더 많다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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