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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Jan 19. 2024

상처 받는 아이들의 목소리

논술쌤의 역할, 어른의 책임을 생각한다

작년 봄 3개월 동안 은유 작가의 메타포라 10기로 학인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썼다. 2주에 한 번 글을 썼는데 은유쌤은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라고 주문했다. 나는 논술 쌤이니 우리 아이들 이야기 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하는, 듣기 싫은 말을 적어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떤 말에 상처받는지, 무엇이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지 궁금했다.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어도 털어놓고 나면 속은 좀 시원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대상은 초 4, 5, 6학년과 중1 아이들이다. 똘똘한 *은이가 물었다. “선생님, 근데요, 이거 엄마한테 보여 줄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적고 있던 *민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엄마가 이거 보면 엄청 화낼 텐데요. 아무 데서나 이런 말 하고 다닌다고." 아이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걱정 마. 너희들이 원치 않으면 오늘 쓴 내용은 선생님만 보고 따로 보관할게. 그냥 맘 편하게 써봐.” 아이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그제야 쓰기에 집중한다.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5학년 *윤이는 진짜 열심히 했는데 “시험 점수가 이게 뭐야?”라며 엄마가 다짜고짜 화부터 내실 때 슬프다고 했다. *유는 “옆집 OO이는 이번에도 100점 맞았대. 에휴… 얘가 정신을 못 차리네.”라는 말을 들으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고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엄마가 왜 이러나 싶어 억울하단다. 수업 시작 전부터 와서 조잘대고 수업 시간엔 먼저 이야기하겠다고 손을 드는 4학년 아이들도 할 말이 많다. *원이와 *우는 “다른 애들은 훨씬 잘해, 학원비만 아깝다니까.”라는 말을 들으면 부아가 치민다며 얼굴을 붉혔다. 요즘 여자 친구를 사귄다는 *호는 “친구랑 놀지 말고 숙제해.”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놀고 싶어, 어쩌라고’ 이렇게 속으로 소리친단다. 좀 머리가 큰 6학년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4학년 때부터 나와 함께 수업했던 *진이는 전에는 엄마와 여행이나 외출하는 게 무조건 좋았는데 요즘엔 친구들과 노는 게 훨씬 좋단다. 게임을 좋아하는 *원이는 엄마가 게임만 하고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후회한다며 으름장을 놓는다고 했다. 자신도 게임을 줄여야 하는 건 알지만 몸이 잘 안 따라준단다. *민이는 경상도 출신 엄마가 심한 욕, 독한 욕, 뼈 때리는 욕을 찰지게 한다고 했다. 차마 다 말할 수는 없다며 “야, 지랄하지 마.” “싸가지 없이 뭐 하는 거야?” “이놈의 새끼야, 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라고만 썼다.


옆집 아이와 비교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엄마들의 공통 레퍼토리다. 친구들과 놀 때가 제일 좋다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벌써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며 하루에 몇 개씩 학원에 보내고 기대했던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본전 생각이 난다. 그렇게까지 지원했는데 왜 다른 애들만큼 못하는 거지 싶다. 하지만 그 동네 아이들이 다 그런 상황이니 옆집 아이보다 잘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부모는 내 아이가 공부 말고 잘하는 게 없는지는 살피지 않고 성적이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공부 못하면 큰일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어른들은 1989년(이미연, 김보성 주연의 영화<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개봉된 해이다)부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으니 남들 하는 것처럼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고 학원을 보낸다. 공부, 성적을 강조하다 보니 정작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줄 시간은 없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꿈이 뭐냐고 묻지 않는다.


중1 아이들과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나서 ‘나를 억압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라고 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에게 주로 어른들의 행동이나 말,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토요일에 학원만 3개라는 *윤이는 자유가 없어서 불행하다고 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학원만 다니고 있는 것 같단다. 자신이 공부를 못하고 시험을 못 봐서 한심하다고도 했다. “공부해.” “그거 하지 마.” “그럴 시간 없어.” “언제 할 거야?” “안돼” “빨리 해” 이런 말들만 듣는단다. 자기의 생각은 존중해주지 않으면서 부담만 주고 재촉하는 어른들이 야속하다고 했다. 경찰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민이가 자신을 억압하는 장소가 집이라고 해서 놀랐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학원 갔다 집에 가면 아빠가 숙제하라고 심하게 닦달한단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면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아빠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며 한숨 쉬었다.


아이돌이 꿈이라는 *정이는 자신의 동의 없이 부모님이 학원 하나를 더 늘렸다며 너무 답답하고 죽을 것 같다는 심각한 표현을 썼다. 가끔 살기 싫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이 공부 잘하고 있냐고 물으면 항상 눈치 보이고 불안하단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데 ‘내가 이 정도밖에 못 하나, 나중엔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다고 했다. 글을 잘 쓰는 *이는 자신에게 억압적인 환경은 학원이라고 했다. 학원에서는 성적으로 학생들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친구들조차 그런단다. 시험 결과에 따라 선생님들의 대우가 달라지고 친구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했다. 성적에 상관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면 좋겠는데 엄마조차도 천재라 불리던 오빠와 자신을 비교한단다. 그럴 때마다 자존감이 쭉쭉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긍정적이고 잘 웃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싶지만, 성적으로 학생의 등급을 매기는 환경에서는 그것이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어른들이 바뀔 것 같지는 않고 공부를 해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 후에 어른들을 바꾸고 싶다는 야무진 포부를 내놓기도 했다. 학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게 *이의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의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는 것은 한 개의 양파다. 수치스러운 과거와 위협적인 현재와 선고받은 미래라는 바탕 위에 축적된 슬픔, 두려움, 걱정, 원한, 분노, 채워지지 않는 부러움, 광포한 포기, 이 모든 게 켜를 이루고 있는 양파”(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윤정임 옮김, 문학동네, 2014, 81쪽)라는 비유가 내내 마음에 걸린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끝없이 경쟁하고, 어른들이 똑같이 들이대는 잣대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어떤 위로를 하고 어떻게 희망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교육 환경을 개혁하거나 당장 부모님의 생각과 태도를 바꿀 수는 없다. 지금은 그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은 위로와 응원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어른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상처 받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어른들에게 전달되고, 우리 사회에 쟁쟁하게 울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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