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몸에 아빠가 살아있다
아빠가 떠났다
2018년 9월 13일 목요일 오후 5시, 아빠는 내 손을 잡은 채 숨을 멈췄다. 아빠는 2년 넘게 암과 함께 살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왔지만 아빠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아빠가 나와 눈을 마주칠 수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다른 세상으로 가 버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한 아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아빠의 장례식. 검정색 상복을 입고 내 마음만큼이나 어두운 빛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을 맞이한다. 아빠를 떠나보내는 슬픔에 잠겨 있을 틈이 없었다. 조문하는 사람들을 잘 맞이하는 일이 자식의 도리라고 누군가에게 배운 기억은 없지만 내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어리다고만 여겼던 두 아들이 까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상주 삼촌 곁에서 내내 조문을 받았다. 대견했다. 울아빠도 손자들이 마지막을 함께 하니 좀 덜 외로웠을까?
화장터. 아빠의 입관식을 보며 너무 많이 울어서인지, 한 줌 재가 되어버린 아빠가 너무 낯설어서인지 짧은 울음 뒤에 담담해졌다. 조그만 단지 속으로 아빠가 들어갔다. 이틀 전만 해도 내 손을 잡고 깊은 숨을 몰아쉬던 아빠가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항아리 속에 있단다. 항아리를 비비며 아빠를 부르면 다시 내 앞에 아빠가 나타날까?
아빠가 떠난 지 일주일. 일상으로 제대로 복귀하지 못한 몸과 마음을 끌고 서점에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썼다. 잘 모르겠다. 그때의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그저 멍하고 무언가 또렷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서점을 몇 바퀴 돌다가 책 한 권을 집어 들기도 했다. 서점에 갈 때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아 고민했었는데 그날은 어떤 책도 선뜻 내 마음에 들어오질 않았다. 몇 장 읽다가 그만뒀다.
요양병원의 간병사는 아빠를 떠나보낸 엄마가 밥도 안 먹고 말도 없이 멍하니 있다고 했다. 그런 엄마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남편을 보낸 엄마가 얼마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가 기억하는 아빠는 어디까지일까? 너무 많은 걸 머릿속에 담을 수 없으니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끝내 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은 채 아빠는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빠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30kg 넘게 살이 빠져나가 뼈만 만져지는 몸으로도 곧 퇴원해서 엄마와 집에서 함께 지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삶에 대한 의지라고 하기엔 너무 지쳐 보였고, 엄마에 대한 사랑이라 하기엔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빠가 사는 방식은 그랬다.
아빠가 바라는, 남겨진 이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유언은 없었지만 많은 시간을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내가 아빠의 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남아 있는 엄마가 괜찮기를, 자식들이 엄마를 잘 돌봐주기를,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겠지.
아빠가 없는 일상이 딸은 아직도, 여전히 낯설다.
아빠가 없다, 김장을 한다.
2018년 9월에 아빠가 떠나고 그해 겨울 남편과 둘이 김장을 했다. 그전까지 우리 집 김장은 아빠의 주도 아래 모든 것이 이뤄졌었다. 농산물 시장 단골 가게에서 100포기가 넘는 배추와 무, 파, 양파, 갓 등의 양념거리를 사 와 다듬고 절이고... 아빠 집에서 1박을 하며 시끌벅적한 김장을 했던 게 2016년 늦가을이었다. 그해 여름 말기암 선고를 받은 아빠는 굳이 김장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자식들과 함께 하고 싶은 그 마음을 알기에 우리 네 형제는 아빠 집에서 1박을 했었다. 그것이 아빠와 함께 한 마지막 김장이었다.
그후로 아빠는 주로 병원에 계셨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김장 홀로서기를 했다. 우리 집의 김장은 남편과 나뿐인 조용한 의식으로 치러졌다. 첫해는 아빠를 흉내내며 40포기나 되는 배추를 사서 다듬고 손수 절였다. 하지만 남편의 허리 통증과 살아서 밭으로 가게 생긴 배추에 질려 다음 해부터는 절임배추를 주문했다. 양념만 준비하는 데도 허리와 어깨, 안 아픈 곳이 없었다. 70이 넘는 연세에 매년 100포기가 넘는 김장을 아빠는 어떻게 해 온 것일까? 이제야 미안하고 고맙고... 마음이 아리다.
아빠는 없는데 난 김장을 한다. 아빠가 하던 방식을 몸으로 맘으로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비와 함께 첫 눈이 내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가 막내딸에게 보내는 신호 같았다. 수고하라고, 쉬엄쉬엄 하라고, 우리 막내딸 혼자서도 잘 해내고 있다고...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김장하느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자꾸만 아빠가 말을 걸었다. 함박눈이 내렸다.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
아빠처럼 미련스러운 하루를 살았다
하루종일 병원에 있는 엄마를 수발들고 집에 돌아와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사 온 생선을 다듬었다. 병원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집에 가서 쉬어야지 했는데 운전대가 엄마가 입원한 병원과 가까운 연안부두 어시장으로 향했다. 엄마 간병 때문에 병원에 다니느라 우리 식구들 밥상이 좀 부실해졌다. 생선을 손질해 냉동실에 넣어두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았다.
마트에서 손질된 생선을 사다 먹으면 편할 테지만 가격 대비 생선의 질과 맛이 다르다. 페미니스트 작은언니는 고생을 사서 한다고 내게 핀잔이지만 몸은 힘들어도 결국 하게 되는 일이 돼버렸다. 연안부두 어시장 아빠엄마의 단골집은 몇 년 전부터 나의 단골집이 되었다. 아빠가 암으로 투병을 시작하시던 그해부터 아빠엄마는 더 이상 집안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빠 집에 있던 김장 도구들이 우리집 베란다로 옮겨왔고 아빠가 했던 생선 손질은 내 몫이 되었다.
갈치, 조기, 자반까지 손질하고 주방 정리까지 하는 데 거의 3시간 가까이 걸렸다. 종아리가 뻐근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거실 바닥에 주저앉으니 입에서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빠가 살았던 하루가 이렇게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신세를 지는 날이 많았던 엄마의 병시중은 항상 아빠의 몫이었다. 매년 우리 집 마늘과 김치, 생선은 일하는 막내딸 대신 아빠가 직접 마련해서 우리 집까지 배달해 주셨었다.
미련스럽게 보였지만 부모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아빠는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좋아라 하며 넙죽넙죽 받아먹는 막내딸에게 흐뭇하게 웃어주었다. 아빠가 하늘나라로 떠나고 불쑥불쑥 아빠가 느껴지는 날이 있다. 채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생선을 보며 아빠를 그린다. 아빠에게서 미련스러움을 물려받았다. 내몸에 아빠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