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제주여행 3일 차
뜻밖에도 밤이 길어졌다. 새벽을 빚지고 서둘러 맞이한 아침은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당초 동쪽 해변 어딘가를 향해야겠다고, 구체적이지 않은 다짐뿐이던 셋째 날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어딘가 아쉬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온몸으로 이 섬과 짧은 휴가를 느낄 무언가가 필요했다. 마침 숙소에서 투숙객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액티비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개중 만만해 보이는 패들보드, 그리고 제주 독립서점 투어를 해보기로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해변으로 향했다. 패들보드를 예약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 모두들 윈드서핑을 하려는 것 같았다. 윈드서핑도 좋았겠지만 나의 동력으로 물살을 가를 수 있는 패들보드가 더욱 끌렸다. 별다른 강습은 없었다. 약간의 설명 후 바로 바다로 향했다. 물을 무서워하냐는 강사의 질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물이 깊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말마따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제주의 바다는 차분히 따뜻했고 저 멀리 한라산은 다정히 섬을 감싸고 있었다. 바다에는 오직 노를 젓는 나 밖에 없었다. 왼쪽, 오른쪽, 방향을 바꿔가며 천천히 물살을 갈랐다. 이따금씩 들이치는 파도에 물살이 튀었다. 비로소 제주에 왔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바람의 힘을 영리하게 이용했다면 좋았겠지만 내게 어울리는 재주는 아닌 듯했다. 오직 나로서, 나의 힘으로 천천히 나아갈 수 있어 좋았다.
노를 하도 저어 팔이 아프다 했더니, 어쩐지 체험이 예상보다 한 시간 길어졌다. 다음 책방 투어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부랴부랴 숙소로 돌아갔다. 바닷물에 젖은 몸을 씻어내고, 숨겨진 책방을 향해 출발했다. 제주에는 곳곳에 다양한 독립서점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점마다 각자의 특징과 매력이 있어, 책방을 찾아다니는 재미 역시 쏠쏠한 편이라고 한다. 숙소 근처에 가보고 싶은 책방이 있어 다녀오려던 찰나, 마침 숙소에서 운영하는 독립서점 책방 투어에서 그 책방을 다녀올 수 있다고 하여 다녀오기로 했다.
모임 장소로 향하니 참가자는 오직 나뿐이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되려 좋았다. 너무 많은 말과 시선 대신, 주어진 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투어 가이드를 담당하는 직원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이런저런 책들을 차분히 둘러보며 책방에서의 시간에 흠뻑 빠졌다. 나는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을 구매하였고, 가이드 분과 각자 고른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을 서로 소개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며, 저마다 다양한 배경과 고민에 놓여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로서 그 고민이 얼마나 비슷한지, 그리고 쉽지 않은 여정 위에 놓인 우리들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생각해 봤다. 불투명한 것들 속에서 정답을 찾고자 하는 젊은 우리들. 각자의 고민에 대한 답으로 나는 우리의 서른이 기대된다는 생뚱한 답을 내놓았다.
주어진 일정을 모두 마치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숙소에 잠시 들른 뒤 천천히 성산의 오솔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깨끗한 하늘이 검은 돌과 새파란 바다를 선명히 비춘다. 현무암 돌담 자락 우거진 수풀 사이를 헤쳐가며 생각한다.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기억된다고. 좋은 순간은 좋은 순간으로 기억된다고. 지금의 여정 모든 순간들을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좋은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좋은 말들은 좋은 말들로 기억될 것이라고. 뜨거운 늦여름 제주에서의 생각과 고민과 걸음들은 끝내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