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너무 부지런했다
숙이 언니와 청량리역 플랫폼에서 만나자 했다.
'언니 4번 플랫폼으로 내려와. 여기 좀 헷갈리네. 경춘선 표시보고 가면 안 되고 'ITX 청춘'이라는 표시 보고 따라와야 돼.'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 언니에게 톡을 보냈다.
'10시 좀 지나서 청량리 역 도착할 것 같애, 늦어서 미안.'
'헉, 언니 시간 안에 못 오면 어쩌지?' 걱정하며 플랫폼을 왔다 갔다 서성이는데 선캡과 빨간 립스틱으로 무장한 60대 후반쯤 아주머니께서
"어디, 춘천 가세요?" 하며 말을 붙인다.
"네"
"뭐 타고 가요?"
"청춘선? 여기 맞죠?"
"표 한번 봐봐요. 경춘선이면 저기 2번에서 타고 ITX-청춘이면 여기 4번에서 타고. 아무거나 타면 안 돼요."
내가 타고 온 경의 중앙선을 하차한 바로 그 같은 곳에서 기차를 타게 되어 있어서 조금은 이상하다 생각했던 터였다.
인터넷으로 예매한 표를 보여 드렸더니,
"네, 여기 맞아요. 2번 차니까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저 쪽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ITX 표시 있는데에서 기다려요."
"감사합니다."
'언니, 바닥에 'ITX 청춘 2-1'이라고 쓴 데에서 기다릴게. 내가 헤매는 거처럼 보였는지 어떤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알려 주시네. ㅋㅋ 오지랖 아주머니 감사하네' 언니에게 톡을 보냈다.
'저는 8,600원 밖에 안 냈어요. 돈 더 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좋아서 황송하옵니다.'
기차는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고 편했다.
"언니, 그런데 밖에 황사야? 아님 미세먼지야? 좀 뿌옇지 않아?"
"그러게, 유리창이 코팅돼서 그런 거 아니니?"
"그런가? 공기가 깨끗해야 될 텐데. 지난주에 서울에서 미세먼지 땜에 밖에도 못 나가고 그랬거든."
사촌인 숙언니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일본에서 한국에 잠깐 놀러 온 미니 스커트를 입은 세련된 20대 숙녀였다. 17살 나이 차이가 나니 어렸을 때는 언니와 같이 뭔가 할 만한 일도 없었고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눌 만한 처지도 못 되었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언니와 공통 관심사도 생기게 되고 우리의 감성과 생각이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
안부인사 나누며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벌써 도착이다. '춘천역'.
아, 그런데. 여기가 어디인지.
나름 춘천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너무 낯설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는 '춘천'은 30년 전 호반의 도시, 춘천이다.
OOPS
강산이 3번은 바뀌었을 긴 시간이었는데 '나'란 주책바가지가 엊그제 일처럼 여기고 있었나 보다.
우선 내가 브런치 장소로 찍어 둔 '유기농 카페'로 가기로 했다.
"언니, 그런데 여기 왜 이렇게 황량하지? 흙먼지인지 황사인지 시야가 뿌연 거 같애."
"그러게, 좀 그렇네."
우리 얘기를 들었던지 택시 기사 아저씨가 한마디 거든다.
"차 앞유리 보면 황사는 아닌 거 같애요. 요즘 비가 안와서 가물어서 그런지 먼지가 많네요."
"그러면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요."
우리는 지금 푸르고 깨끗한 공기와 만개한 봄꽃과는 전혀 상관 없는 도시에 와 있다.
춘천역에서 카페까지 택시 요금 17,000원이 나왔다. 꽤 먼 거리다.
'앵? 여기도 인터넷에서 본 것과는 좀 다르다.'
빨간 튤립이 예쁘기는 한데 유채꽃이 있어야 할 밭에는 누렇게 마른 흙만 있다.
Farm to Table 카페에서 먹을 만한 신선한 샐러드를 기대했는데, 평일이어서 주문할 수 있는 게 디저트 메뉴 정도다. 어쩐다.. 라벤더 차와 레몬그라스 차를 주문하고 생소해 보이는 '옥수수 치즈 케이크'를 먹어 보기로 했다.
"저, 그런데 여기에 꽃밭이 예쁘다고 들었는데"
"유채 씨를 심었는데 아직 싹이 안 나왔어요. 요즘 날씨가 건조해서 걱정이네요."
디저트와 티를 먼저 먹고 나중에 점심을 먹자 하고 카페에 앉아서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이러다 하루 다 가겠다 싶어서, 다음 일정으로 가보기로 했다.
카페 직원 분에게,
"김유정역에 가보고 싶은데, 여기에서 가는 좋은 방법이 택시 밖엔 없나요?"
"거기까지는 거리가 좀 있어서요."
"지도를 보니 그렇긴 하네요."
"다른 곳 추천해 주실 만한 곳이 있을까요?"
"공지천에 가보셨어요?"
"네, 오래전에."
다소 실망스럽다. 여기까지 와서 또 공지천?
김유정역을 가자면 춘천에서 다른 곳을 못 갈 것 같고. 시간도 애매하고.
"사실 춘천이 별로 갈 데가 없어요."
띠로리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ㅠㅠ."
친절하게 열심히 설명해 주던 직원이 미안했던지 크게 웃는다.
"언니, 그럼 우리 공치천에 가서 산책이나 하자."
다시 택시를 타고 공지천으로,
유기농 카페에서 공지천까지 택시비 12,000원.
"여기가 공지천이에요. 여기에서 내리시면 돼요."
헉, 여기도 내가 알던 그곳이 아니다. 아~~ 낯설다. 너무 낯설어.
우리는 개나리가 피어있는 춘천 MBC 올라가는 길보다는 그 건너편의 한적한 둘레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걷다 보니, 다소 크다 싶은 '소양강 처녀' 상이 보인다. 중도로 가는 선착장도 있다.
배를 타고 5분 이면 도착하는 '중도'. 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MT로 한 번쯤은 가 보았을 곳이다.
소주 마시고 취해서 흥분하면 미친 듯 부르던 '소양강 처녀'.
부르다 보면 누군가 받아친다.
'소양강만 강이냐, 두만강도 강이다.' 하며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에궁, 그때는 왜들 그렇게 무식하게들 마셔댔는지. 지금 생각하면 ㅉㅉ
1시간 넘게 산책하고 늦은 점심으로 옹심이 메밀국수를 먹었다.
국물이 걸쭉하니 크림수프 같다. 보리밥도 한 주걱 따로 나오고 배추 겉절이와 시큼하게 익은 열무김치도 맛났다. 한참 만에 식당에서 나와서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 춘천역까지 갔다.
날씨는 따뜻하지만 바람 때문에 옷깃을 여며야 했다.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다.
꽃이라고는 개나리와 카페에서 본 튤립, 생뚱맞게 혼자 활짝 핀 목련 나무 '딱' 한 그루.
다소 아쉽기는 해도 뭐 그게 대수인가. 여행이란 함께한 사람과의 소중한 시간이 더 중요한 거지.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출발 20분 전에 탑승해서
예쁜 목소리의 숙이 언니와 조곤조곤 얘기하고 있는데,
옆 줄 뒷좌석에 앉은 퉁퉁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거기 두 분이요. 조용히 해주세요. 대화 소리가 신경이 쓰이네요." 하며 핀잔을 준다.
우리 목소리가 그렇게 컸나?
"네, 죄송합니다. 조용히 얘기할게요."
숙이 언니는 계속 소곤소곤 얘기를 한다.
청량리 역에서 내릴 때 보니 아줌마는 꿀잠을 자고 있다.
"언니, 아무래도 저 아줌마가 우리 대화 내용이 궁금해서 신경이 쓰였나 봐. 우리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우리 대화 내용은 못 들었을 거야. 조용히 얘기하고 있었잖아."
"그런데, 신경 쓰인다잖아. 아무래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그런 거 아닐까?"
청량리역에서 언니와 헤어지며 4월 중순에 삼청동에서 만나 성곽길을 걷자 약속하고 헤어졌다.
친한 싱가포르 친구가 가족들과 지금 한국 여행 중이다.
안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와본 사람은 없다는 한국
엊그제 부산으로 간다고 했는데 지금 진해에 있다면서 쾌청한 날씨에 활짝 핀 벚꽃 사진을 보내왔다.
"니가 나보다 낫다. 나는 춘천에 너무 일찍 가서 봄이 아니라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모습만 보고 왔어."
하고 답했다.
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