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9월 한 달을 꼬박 지내본 게 언제였던지.
9월이면 가을인 줄 알았는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가을이 늦게 오는 건지 더워서 9월 한 달 내내 병실에서 에어컨을 틀고 지냈다.
가을이면 하늘이 높아야 하는데 9월에도 서울의 하늘은 내가 기억하는 가을 하늘 만큼 높아지지 않았다.
외국인 친구들에게 "오늘은 하늘이 한국의 가을 하늘 같아. 높아" 하고 말하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늘은 원래 높은 거 아니야? 한국은 하늘이 낮아?"
"하늘이야 원래 높지만 유난히 높게 느껴지는 때가 있잖아."
"글쎄. 그럴 수도 있나?"
마치 이과생과 문과생의 대화 마냥 보는 관점이 틀려서 인지 의사소통이 되질 않는다.
올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월에서 4월까지는 남편이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8월부터 지금까지 두 달여는 내가 다치면서 우리가 계획하지 않은 이런저런 이유로 6개월을 한국에서 지냈다. 네 달은 호텔에서 두 달은 병원에서~
덕분에 '겨울-봄-여름-가을'의 순서로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을 즐길 수 있었다.
태어나고 자란 한국이지만 타국에서 더 많은 날을 살았고 부모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시면서 친정이라 할 만한 공간마저 더 이상 한국에 없다. 과연 한국은 현재의 나에게 어떤 곳인지, 미래의 나에게 어떤 곳일지 생각해 본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출신지'에 불과한 지. 생각만 해도 가슴 뜨겁게 그리운 '고향'인지.
추석 연휴 중에 남편은 60세 생일을 맞았다.
8월 25일에 하기로 한 남편의 퇴직 파티도 9월 27일 남편의 60세 생일 파티도 내가 다치면서 무산되었다. 퇴직 파티에서 전달하려고 가족들이 특별히 주문 제작한 남편을 닮은 피규어는 여전히 남편에게 전달하지 못했고 조카가 우리 부부의 사진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케이크 주문도 취소해야 했다.
남편의 생일에 무엇을 해 줄까(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병실을 꾸며서 깜짝 놀라게 해 줘야겠다는 계획을 세워 '은밀히' 진행했다. 쿠*으로 풍선과 장식할 때 필요한 재료를 주문하고 침대 옆 서랍장에 배달된 물건을 숨겨 두었다. 생일 전날 남편에게 빨래를 해오라며 빨랫감을 가지고 외출하도록 유도한 후 남편이 병실에서 나가자마자 쿠* 배달 봉투를 열어 풍선에 공기를 주입하려는데, 이걸 어째... 공기 주입하는 펌프를 별도로 주문해야 한다는 걸 몰랐다. 결국 풍선 봉투 안에 함께 들어 있는 얇은 빨대로 혈압을 올려가며 볼이 터지게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내 입에서 나오는 공기만으로 풍선을 채워나갔다. 남편이 빨래를 마치고 돌아오기 전까지 모든 걸 마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장식을 마치고 카드를 쓰려고 봉투를 열어 보니 카드가 아닌 메모지 만한 생일 엽서가 한 박스 들어 있다. 할 수 없이 생일 엽서 6장에 조각조각 나누어 축하 메시지를 적었다.
결혼한 후에도 생일에 출장을 가거나 하면 함께 하지 못하는 때가 있어서 둘이 함께 생일을 지낼 때는 나름 크고 작은 이벤트로 남편의 생일을 축하해 주곤 했다.
가족들의 축하 메시지를 담은 영상을 생일 선물로 준비해서 남편을 깜짝 놀라게 했고 LED 전구가 들어간 풍선으로 집을 장식해서 황홀함에 빠지게도 했다. 내가 직접 만든 케이크(소다를 너무 많이 넣어 빨래 비누 냄새가 나서 먹지 못했다)에 초를 꽂아 노래(나는 음치로 유명하다)를 불러 준 적도 있었다.
25년을 함께 살면서 이런저런 깜짝 이벤트를 준비해 보았지만 병원 입원실에 풍선을 불어 장식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혈압을 높이며 볼이 터지게 준비한 풍선 장식을 본 남편은 크게 감동했다.
해마다 그랬지만 올해도 역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감동보다는 '감사'의 눈물이라고 했다. 불편한 몸으로 입원해 있으면서 자기의 생일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나의 마음이 감사하고 감사하다 했다.
장식 덕분에 병실을 드나드는 간호사, 의사,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들, 식사를 가져다 주시는 아저씨까지 많은 분들이 남편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이 정도 영어는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요. Happy Birthday~~"
"이제야 영어 한마디 해보네요. Happy Birthday!"
남편의 생일 케이크로 생각해 둔 게 있었는데 남편은 병원 앞 **바게트에 드나들면서 자기가 봐둔 케이크가 있다며 직접 자기 생일 케이크를 사 오겠다고 했다.
"자기 생일 케이크를 직접 사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주문하면 배달해 주니까 내가 주문할게"
"아니야. 내가 봐둔 케이크가 있어. 내가 직접 가서 사 올게."
"어떤 케이크인데?"
"비밀이야."
남편이 사 온 케이크는 **바게트의 여러가지 케이크가 조각으로 들어 있는 유치 찬란한 모양의 케이크였다.
모든 맛의 케이크를 다 맛보고 싶었던가 보다.
10월이 되자 아침저녁 제법 쌀쌀하다. 가을다운 가을은 짧게 얼굴만 비치고 지나갈 것만 같다.
요즘 찬 공기를 만끽하며 병원 근처 골목에 있는 카페를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환자복 위에 재킷을 걸치고 휠체어를 타고 처음 카페에 들어갔을 땐 카페 주인이 놀라는 눈치였는데 요즘은 우리를 보면 문 앞까지 나와서 아는 체를 한다.
따뜻한 낮에는 야외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활짝 열어젖힌 통창 옆에 앉아 디저트를 먹기도 한다.
주택가에 있는 카페다 보니 누군가 요리하면서 풍기는 한국 음식 냄새가 카페 정원에서 나기도 한다.
"킁킁. 이거 무슨 냄새지? 된장국인가? 김치찌개?"
"누가 미역국 만드나 봐. 마늘에 미역 볶는 냄새가 나."
이제 열흘 후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로 가게 된다. 그리고 연말이면 미국으로 이사한다.
내가 다쳐서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하게 된 건 유감이지만 그로 인해 스쳐 지나는 인연일지라도 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한국에서 가을을 보내게 된 건 감사한 일이다.
"미국 가지 말고 한국에 정착해서 살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사고에 기막혀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총기 사고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미국 사회를 보며 답답해서 하는 말이다.
"어느 나라건 속속들이 자세히 알고 나면 좋기만 한 곳이 어딨겠어."
"그래도 한국은 미국하고 비교하면 안전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높은 의료 수준에 비해 병원비도 싸고 etc......."
남편은 회사에서 일을 할 때 겪었던 한국과 퇴직하고 난 후 회사 밖에서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부부로서도 그렇고 남편과 우리가 한국에서 지낸 지난 두 달은 특별한 추억으로 영원히 기억될 거다. 다쳐서 아팠던 거만 빼면 감사한 시간이었고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