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8년 전 낭독 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눈으로만 글을 읽어왔던 나는, 책 읽는 거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1년간 낭독을 완료한 책은 단 2권뿐이었다. 한 페이지를 녹음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쉽게만 생각했던 문장 부호와 그림, 각종 수식과 표들은 나를 당황케 했다. 머리가 하얘져 그대로 책을 들고 담당 선생님에게 달려간 게 수십 번이었다.
첫 교육을 듣던 날, 몇 명 되지 않는 신규 봉사자들이 동그란 테이블에 수줍게 앉아있던 것이 떠오른다. 담당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낭독 봉사에서 중요한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고. 그리곤 테이블 옆에 있던 책꽂이에서 무작위로 책 한 권을 빼내어 낭독했다. 들리는 책은 어쩐지 조금 낯설게 들렸다.
제2 테이프 A면은 17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괄호 열고, 괄호 닫고.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칼 세이건, 씨 에이 알 엘 에스 에이 쥐 에이 엔
오십육 페이지에 표가 있으나 본문과 중복되므로 설명은 생략합니다
낭독 봉사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이었다. 당시에 시각 장애인 분들의 오디오북에는 다양한 문장 기호와 표, 그림에 대한 구두 설명이 들어가야 했다. 예를 들어, 영화나 책 제목을 말할 때는 제목의 앞, 뒤에 붙어있는 괄호 기호를 소리 내어 읽어야 했다. "괄호 열고 라라랜드 괄호 닫고"와 같이 말이다. 듣는 이가 어디까지 영화나 책 제목인지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마찬가지로 대화문에서는 따옴표 기호를 대화문 앞, 뒤에 말해야 했다. 전문 책의 경우, 매 페이지의 첫 문장을 시작하기 전에는 "십칠 페이지", "십팔 페이지"등을 말로 알려야 했다.
낭독 봉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많은 책을 뚝딱뚝딱 쉬지 않고 낭독할 줄 알았다. 하지만, 녹음 프로그램에 익숙해지고, 낭독 방법을 익히는 것에서부터 쉽지 않았다. 그 무렵 그동안 잘 인지하지 못하던 수많은 노란색 보도블록이 눈에 들어왔다. 위험한 길 앞에서 끝나버린 보도블록이 신경 쓰였다. 횡단보도 음향신호기가 잘 작동되는지도 궁금해졌고, 보도블록 앞에 쓰러져있는 자전거나 킥보드에는 화가 났다. 종종 방문하던 카페에 시각 장애인 직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만들어준 커피는 향이 좋았고, 무척 맛있었다. 나는 그곳의 단골이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맞다, 고양이를 키우면서도 느낀다. 첫째 고양이 사또를 키울 때였다. 배에 털이 없는 부분이 피부염인 줄 알았다. 이게 뭐지? 깜짝 놀라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고양이 배꼽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가족들과 이야기하며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사또가 몸을 꿀렁이며 뭉친 털을 처음 토해냈을 때도 헤어볼인지 몰라서 눈물을 흘리며 검색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초보 집사였다. 그만큼 고양이는 내겐 너무 낯선 존재였다.
사또와 바바, 두 마리 고양이와 10년을 넘게 함께 생활하며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프로 집사가 되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꼬리 움직임만 봐도, 우리 집 고양이가 어떤 감정 상태인지 알 수 있다. 바바가 크고 길게 "냐아아앙" 소리를 내면 당장 맛있는 먹거리를 내놓으란 거다. 그럴 땐 간식 박스에서 바바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를 꺼내서 건네주면 된다.
지금 내 삶은 고양이에게 맞춰지고 있다. 오랜 여행은 바라지 않게 되었고, 고양이들만 집에 내버려 두는 것이 미안하여 재택이 있는 회사로 이직을 하기도 했다. 큰 행동이나 목소리에 겁 많은 둘째 고양이 바바가 놀랄까 봐 집에선 늘 조심조심 지낸다. 다만 더 이상 동물농장에 나오는 마음 아픈 이야기는 재미로 보지는 못하게 되었다. 비쩍 마른 길냥이를 보면 마음이 쓰이고,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 동물 이야기를 들으면 같이 펑펑 울게 된다. 모든 소중한 생명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보이고 들리고 느끼는 것이 전보다 많아졌다. 삶이 풍부해진 거라고 믿는다. 모르는 건 배우고 알아가면서, 모두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삶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