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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티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by 윤모음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를 만났다. 우산도, 우비도 없었다. 사방이 뻥 뚫린 돌로미티의 돌산 한복판이라 비를 막아줄 나무도 한 그루 없었다. 땅에서는 흙냄새와 젖은 돌 냄새가 났고, 빗물은 금방 차올라서 걸을 때마다 흙탕물이 튀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산장으로 달려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공기와 커피 향이 동시에 밀려왔다. 축축이 젖어있던 몸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테이블은 이미 만석에 가까웠다. 운 좋게 가장 안 쪽 깊숙한 곳에 있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이내 우리와 같은 처지의 손님들이 산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옷의 물기를 털어내며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 벽난로 근처로 모이는 이들로 산장은 점점 발 디딜 틈 없이 복작거리기 시작했다. 주인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능숙하게 손님을 맞았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어디선가 여분의 의자를 가지고 와서 테이블 곳곳에 끼워 넣었다. 2인용 테이블은 4인용이 되었고, 4인용 테이블은 8인용이 되었다. 서있던 사람이 의자에 앉으면, 앉아있던 사람이 조금씩 옆으로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든 이가 모르는 누군가와 합석을 하게 되었다.


돌로미티는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거대한 알프스 산맥 지역이다. 그 광활하고 거대한 산맥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작고 작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을 하든 자연이 품어줄 것 같은 포근한 느낌을 받는 묘한 곳이기도 하고.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우리뿐만은 아닌 듯 하다. 어딜 가든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이 보였으니까. 그곳에선 원한다면 어디든 돗자리를 깔고 눕고, 먹고, 읽고, 노래하고, 춤출 수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연 속에 자리를 잡고 뒹굴 거리며 책을 읽거나, 해질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형형색색 수영복을 입고 호숫가에서 뛰어노는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그저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것이 보기 좋았다. 누구도 다른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는 서로에게 한없이 다정할 뿐이었다.


산장 테이블에 앉아 남편과 함께 레몬소다 음료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봤다. 땅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작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세차게 바뀌었다. 꽤 굵은 비였지만 하행길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돌로미티의 날씨는 변덕스러우니까. 그 변덕이 믿음직스러울 뿐이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다가도, 금세 구름이 걷히고 조금만 있으면 해가 비출 거였다. 어쩌면 이 비도 우리를 잠시 쉬게 하려는 자연의 귀여운 장난일지 몰랐다.


산장에 있는 그 누구도 조급해하거나,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자 산장은 점점 활기를 띠었다. 어떤 테이블에서는 카드 게임이 한참이었고, 한쪽에서는 산장에 구비된 기타를 가지고 누군가의 연주가 시작됐다. 몇몇 손님들은 그 리듬에 맞춰 흥얼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우리 테이블에 합석한 한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주근깨가 살짝 있는,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여자 아이는 미소를 띠며 조심스레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으며, 신혼여행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축하한다며, 이곳에 신혼여행을 온 것이 멋지다며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물었고, 자신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이곳은 엄마의 고향이어서, 이번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 온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 창밖의 소나기가 잠잠해졌고, 우리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여자 아이와 친구들은 웃으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영업시간이 종료된 뒤에 찾아간 피자집에서도 따뜻한 마음은 이어졌다. 직원들은 우리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 시간엔 근처에 문 연 식당이나 마트가 없어요”라며 이곳에서 주문하라며 기꺼이 우리를 응대해 주었다. 퇴근이 늦어져서 귀찮거나 짜증 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음식 맛은 입에 맞는지 묻고, 장난처럼 말을 걸어오며 편안하게 해 줄 뿐이었다. 그 순수한 친절함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었다. 돌로미티의 공기에는 분명 어떤 너그러움이 섞여 있어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평온함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라고.


돌로미티의 숙소를 떠나던 날, 나는 자동차 밖의 일몰을 보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다. 어쩐지 그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 서운해져서, 그 다정한 세상이 조금 더 나를 품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그 자연의 품 안을 떠난다는 것이 왜 그렇게나 서글펐는지. 그 감정은 다음 날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돌로미티에 머무는 동안, 우리에겐 걱정이란 것이 없었다. 날씨 걱정도 없었고, 사람 걱정도, 미래 걱정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주어진 자연을 바라보는 현재만 있었다. 산과 바람, 햇빛과 사람, 그 단순한 행복이 우리를 신나게 했다. 그때 남편과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삶에 대해 오랫동안 얘기했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삶이었다. 큰돈을 벌지 않아도 좋고, 화려한 도시의 중심에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자연에 둘러싸여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드는 삶. 그것이면 충분했다. “나중에 하지 말자. 돌아가면 바로 해보자.” 남편과 나는 그렇게 약속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여전히 돌로미티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느꼈던 여유로움과 행복은 여전히 우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 덕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요즘 우리는 그때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 중이다. 나는 글을 쓰고, 남편은 노래를 만든다. 아주 한적한 시골 주택에서 말이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마치 돌로미티에 있던 그때처럼 눈앞의 지금을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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