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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펌, 그 자유로움에 대하여

by 윤모음

저기는 찐이다, 간판을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치이며 일하다가, 간만에 틈이 생겨서 여행을 온 참이었다. 군산은 어딜 가나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했고, 어린 시절 뛰어놀던 옛 동네를 그대로 보존한 듯한 풍경이 정겨웠다. 그 가운데, 번화가를 조금 벗어난 골목 어귀에 자리한 50년은 되어 보이는 그 양각 간판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문을 열고 신난 목소리로 사장님께 물었다.

-사장님, 혹시 히피펌 가능한가요?


가게를 청소하고 있던 사장님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게 뭔지 되물었다. 우리는 “그냥 아주 라면처럼 빠글빠글한 파마요”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은 들어오라며 손을 까닥였다. 그녀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가운을 꺼내 내밀며 가운데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에 앉으라고 했다. 자리에 앉은 건 내가 아닌 남자친구였다. 남자친구가 곱게 묶고 있던 머리카락을 풀자, 어느덧 가슴까지 길어진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는 이년 째 머리를 기르는 중이었다. 살면서 한 번은 장모종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그의 어필에 나는 굳이 반대할 마음이 없었다. 자기 인생이고, 자기 머리카락이니까, 원하는 대로 하는 거지 뭐. 하는 생각이었다. 히피펌을 하고 싶다는 그의 주장에도 그러려니 하며, 괜찮은 미용실을 함께 찾아볼 뿐이었다. 군산에서 마주친 그 미용실은 아주 오래된 동네 찐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싶다는 남자친구의 바람에 아주 딱 맞는 장소처럼 보였다.


에구구 앓는 소리를 내며 쪼그려 앉은 사장님은 구석에 짱 박혀있던 모나미 볼펜 두께만큼 얇은 롯뜨를 주섬주섬 꺼냈다. 요즘은 여기 동네 할머니도 이렇게 얇은 롯뜨로는 파마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는 장갑을 끼고 결의에 찬 얼굴로 무장한 뒤, 아주 꼼꼼하게 그의 머리를 하나하나 꼼꼼히 말기 시작했다. 얼마 뒤, 조심스럽게 롯뜨를 풀어내자 정말 라면 면발처럼 꼬불꼬불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용수철 같은 탄성을 머금은 채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꽤나 재미있어서 그날 하루 종일 나는 그의 머리만 봐도 눈물이 날 만큼 웃음이 났고, 내가 웃는 모습을 본 그 또한 잇몸을 활짝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히피펌을 한 그는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그의 표정에는 오래도록 갈망하던 것을 가진 자의 어떤 기쁨이 어려 있었다. 머리를 어떻게 말리느냐에 따라서 가끔씩 그의 머리는 왕년의 미스코리아 헤어처럼 풍성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은 바람에 제멋대로 흩날렸고, 나는 더더욱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의 히피펌은 정말 그 자신을 닮은 머리였다. 이제는 미니멀로 살겠다고 하지만, 이미 집을 빵빵하게 만들 정도로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 사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은 사람, 음악 없이도 춤을 추는 사람인 그에게 히피펌은 전혀 거리감이 없었다.


그의 머리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 복잡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 보기도, 멋지게 보기도, 또 이상하게 보기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시선의 끝에는, 늘 놀라움과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의 머리는 점점 길이보다 무게를 품기 시작했다. 엉키는 머리카락을 빗어내며 그는 가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고, 결혼식이 가까워지자 머리를 자를 시기가 왔음을 스스로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몹시 가벼워진 머리카락으로 돌아온 그는 샴푸질이 편해졌다며 개구장이처럼 웃었다. 사진을 찍으니 짧은 머리를 한 그의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평온해 보였다.


얼마 전 나는 난생처음 히피펌을 했다. 가느다란 롯뜨가 머리카락을 감쌀 때마다 입꼬리가 계속해서 올라갔다. 문득 그의 행복했던 얼굴 표정이 떠올랐다. 혼자 재밌는 상상을 하며 ‘이제는 내 차례가 맞지’라고 결론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펌을 하고 나오니 볼륨이 풍성해진 머리카락에서는 손이 닿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손끝에 닿는 낯선 질감이 재미있어서 또 혼자 킥킥거리면서 거리를 걷게 되었다. 그를 만나고는 퐁실해진 머리를 흔들고, 막춤을 추며 장난을 쳤다. 요즘 그는 평온하고, 나는 흐트러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꼭 서로를 닮아가는 듯해서 즐겁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따라 하고, 또다시 달라진 서로를 닮아가며 오래도록 행복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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