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첫날, 우리는 물의 도시 베니스에 있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가 커튼을 조금 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까치집처럼 흐트러진 머리칼과 설레는 기색이 묻어나는 뒷모습이 꽤 귀여웠다. 조용히 옆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사진을 찍었다. 찰칵 소리에 그가 돌아섰다. -유럽은 어떤 것 같아? 내가 묻자,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엄지손가락을 검지 안쪽 첫 번째 마디에 붙이고 이만큼, 그러니까 아주 조금 무서운 것 같다고 대답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곤 다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깥을 살펴보았다.
새벽 네 시쯤 숙소에 도착한 우리의 체력은 완전히 방전되어있었다. 바깥 구경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게 없었고, 피곤함에 절여진 몸은 땅바닥으로 점점 축 늘어지는 중이었다. 침대에 달려가 안기듯이 몸을 던져 깊게 잠이 들었고, 그리하여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유럽의 분위기라는 것을 전혀 느끼질 못한 상태였다. 한숨 자고 일어나 개운해진 몸으로 바라본 창밖의 기차역 건물은, 피곤했던 감정을 단번에 바꿔주었다. 연노란 물감을 한 방울 풀어놓은 것 같은 아이보리 색감의 유럽풍 건물은 낯선 땅에 왔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이곳에 오기 전, 우리는 3개월 가까이 쉴 틈 없이 달렸다. 이제 막 새로운 회사에 이직을 한 나, 이제 막 자신만의 매장을 오픈한 그는 서로의 밥벌이 전선에서 전력 투쟁 중이었다. 결혼식을 코 앞에 두고 신경 쓸 것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았던 것도 정신줄을 놓는 것에 한몫을 했다. 혼이 빠진 채로 길을 걷다가 ‘여기가 어디지?’ 혹은 ‘언제 여기까지 왔지?’라고 퍼뜩 정신을 차린 적도 있었다. 한국에서의 하루하루가 너무 숨가빴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결혼식이 얼른 끝나고 신혼여행을 가기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신혼 여행을 유럽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눈치 보지 않고 먼 나라로 떠나 완전히 해방된 기분, 새로운 기분을 느끼고 싶은 이유가 컸다. 우리는 가고 싶은 나라를 각자 한 곳씩 정하여 일정에 넣었다. 그때 나는 이탈리아 북부를, 그는 포르투갈을 찜했다. 대학 시절,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교환학생을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금방 유럽에 다시 오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벌써 12년 전 일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유럽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유럽 친구들의 몸에서 나던 섬유유연제 향, 씻을수록 머리카락을 퍼석퍼석하게 만들던 석회수,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건조하게 내리쬐는 햇볕까지. 베니스 본섬을 돌아다니며 내 기분은 점점 가벼워졌다. 유럽 여행은 처음이라는 그 또한 즐거워 보였다. 보이는 모든 것이 생경하다고 말하며, 신기한 듯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그는 계속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걸음을 멈춰 셔터를 눌렀다. 그가 담는 건 멋진 풍경이나 맛있는 음식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현지인들의 일상이었다. 큰 나무 그늘에서 햇볕을 피해 누워있는 지친 청소부, 관광지 한 편에서 거리를 매섭게 지켜보는 경찰이나 군인들, 보조기를 밀며 천천히 공원을 걷고 있는 할아버지, 큰 강아지와 음식을 나눠 먹는 레스토랑 직원, 카페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는 중년의 남자까지. 그는 현지인들의 모습에서 자유와 여유, 그리고 멋스러움을 발견한다고 했다.
-솔직히 나는 살면서 이탈리아에 가고 싶단 생각은 해본 적 없었어. 그의 진지한 발언에 나는 갑자기 길 한복판에서 웃음이 터졌다. 보이는 것마다 우와 소리를 내며 감탄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행복한 듯 미소 짓고, 파스타와 깔라마리(=오징어 튀김)를 먹으며 미간을 찌푸리며 맛있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과 제법 모순된 말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 지금은 어떤데? 내 웃음기 가득한 물음에 그는 입을 헤 벌리고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이어 말했다 - 여기 살고 싶어. 저 현지인들 속에 머물고 싶다.
본섬을 둘러보다가 유리 공예가 유명하다는 무라노 섬에 들렸다. 혼자였다면 어물쩍거리며 가지 않았을 좁은 골목을 들어가 구경하고,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맘에 드는 목걸이도 두 개나 샀다. 하루 종일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걷다가 서로 시선이 마주치면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다.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 왔다는 것, 손을 마주 잡고 온기를 느끼고 있다는 것, 이토록 멋진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묘하게 내 기분을 들뜨게 했다. 뜨거운 햇볕에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땀에 쩔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스럽게 여겼다.
- 8월의 이탈리아는 역시 덥지? 라고 말하곤 그가 잎사귀가 풍성한 나무 아래의 그늘을 가리켰다. 우리는 나무 그림자 아래서 마주보고 주저앉아 열기를 식히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우리가 계속 웃고 있었다는 것.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우리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몇몇은 걸음을 멈추고 우리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는 것이다. 내 삶도, 우리의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기뻤다는 것도.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두 달이 지났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서 많은 것들을 희미하게 만들지만, 문득 그때의 공기와 웃음이 떠오르면 조금은 숨이 가벼워진다. 업무나 상황에 짓눌려 쭈구려져 있던 마음이 팽팽하게 펴지는 기분이다. 너무 힘들어서, 빨리 하루가 흘러가버렸으면 하던 마음도 흐릿해진다. 익숙해져서 놓치곤 하는 이 시간이, 누군가의 눈에는 멋진 피사체일 수 있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