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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Apr 11. 2021

1장 무너뜨려야 하는 이타심

당신의 글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

모호함의 위험성


자신의 글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면 절대 외우지 말아야 하는 주문이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라는 말이 그 주문이다. 겉으로는 좋은 결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글쓰기라는 영역에서만큼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 또는 ‘모든 사람’이라는 전제 자체가 도움을 주고 싶은 명확한 대상이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너무 많은 대상을 염두하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라는 결심으로 글을 쓰는 꼴과 같다. 정말 이 주문을 스스로 외우고 싶은가? 대상을 명확히 정하지 않고 도움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정인지 지금부터 생각해보자.       




   


무능력자의 탄생


머리말에서 글쓰기를 산통에 비유했으니 이번에도 글을 자식으로 빗대어 이야기해보려 한다. 많은 부모가 직접 자신의 자녀를 특색 없는 사람으로 길러버린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 비극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녀를 올바른 사람으로 양육하겠다는 부모의 일념에서 시작된다. 그 일념이 자녀를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그저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는 자녀와 눈을 맞출 때 사랑이 아닌 통제의 필요성을 먼저 느낀다. 자녀를 통제해야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겠지만, 대부분은 강압적인 방법을 쓰게 되면서 전혀 올바르지 못한 통제를 휘두른다. 예를 들면 시험 성적이 잘 나와야만 굉장히 예뻐해 주고, 그러지 못할 때는 화를 내며 비난하거나 외출과 용돈을 허락하지 않는 식이다. 이렇게 잔인한 양육을 받아도 대부분의 어린 자녀는 부모의 요구에 자신을 맞춘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이다. 문제는 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아이의 성장은 진정한 의미의 올바른 사람보다 애정을 갈망하는 종속적인 사람으로 향할 확률이 높다는 것에 있다. 올바름의 의미를 복종으로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의 일상은 갈수록 처참해진다. 아무에게나 도움을 주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에 대인관계에서 늘 을의 위치에 서 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도 자신이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탓에 가까운 사람의 결정에 의지한다. 자신이 인식할 수도 없이 모든 결정의 기준을 과거에 매어놨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 기준은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애정의 자리를 타인으로 메꾸는 것이다.      




심리학자 스콧 펙은 자신의 저서에서 신경증 환자들의 문제적인 성향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신경증 환자들이 과도한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문제까지 과도하게 품으려 한다는 것이다. ¹ 이는 애정결핍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가치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면 타인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정서적인 학습에 이를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곳에 도움을 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게 된다. 당연히 타고난 재능을 전부 발휘할 확률도 낮다. 이런 명령, 저런 도움 요청이 급류라도 되는 것처럼 휩쓸리다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일로 삶을 채울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특색이 없다는 것’ 그래서 ‘잊히는 것’ 이것이 도움을 주고 싶은 대상을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결말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춘 글을 쓰겠다고 한다면 다시 고민하기를 바란다. 당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부분까지 신경을 쓰다 보면, 당신이 타고난 재능은 글 속에서 낄 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정말 그래야만 한다면 지구 상에 보관할 곳이 없는 거대한 책이거나, 적당한 크기라면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책이 나올 것이라는 각오쯤은 해둬야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방금 설명했던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처럼, 책의 내용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책에 주제가 없다거나, 읽을 필요성이 없는 얕은 내용이라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족시킬 사람의 범위를 스스로 통제한다면 어떨까? 그 부분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동일시의 오류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 더 큰 목적을 발견할 때 흔히 범하는 실수가 하나 있다. 자신의 글이 너무 좋게 느껴지기에 타인도 똑같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글쓴이의 바람과는 다르게도 글이 대체로 한 사람만을 만족시켜 준다. 바로 글을 쓴 당사자 한 명만 만족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도우려는 글쓴이의 마음이 실망감을 맛보는 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글을 쓴 당사자가 아니면 공감하기가 난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글을 쓴다는 행위가 치유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법륜스님은 강연을 할 때, 내면의 격정을 잠재우는 방법으로서 ‘알아차림’을 자주 언급한다. 자신의 감정 상태를 직시할 수만 있어도 감정의 파도가 어느 정도 잦아든다는 이야기이다. ² 나 또한 여러 번의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원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정신없이 휩쓸리는 느낌이었다면, 소용돌이가 사라지진 않았어도, 조금 멀리서 소용돌이를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이런 경험은 일기처럼 자신에 대한 글을 쓸 때 자주 경험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쓰다 보면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시점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때 감정의 소용돌이를 벗어나면서 일어나는 치유 덕분에 ‘글이 좋다’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엿볼 기회가 유난히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자신에게 위로가 된 글이 타인에게도 똑같이 도움을 준다고 여기면 큰 착각일 수도 있다. 탐구된 것은 오직 자신의 내면이지 타인의 내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면, 공감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자신에게 맞춰진, 자신을 위한 글이 넓은 범위의 공감을 이끌어내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글을 쓰려면 고개를 들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해야 한다. 더 큰 목적을 바라보게 된 만큼 더 넓은 세상에서 명확한 근거들을 발견하며, 타인에게 도움이 될 요소들을 탐구해야 한다.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며 노트에 답을 써보세요.

   

Q.1 글을 잘 써야만 한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뒤에 뭘 숨기고 싶어 할까?

Q.2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 어떤 느낌인가?

Q.3 좋은 글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주길 원하고 있는가?

Q.4 몇 살 때부터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싶어 했을까? (흐릿한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Q.5 좋은 글을 쓰겠다는 자신의 결심이 무엇을 놓치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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