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결핍이 일으키는 가장 큰 문제는 미움과 불안에 한눈파는 것에 있다. 좋지 않은 감정에 한 눈 팔다가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미움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잃지만, 해결되지 못한 미움은 다른 곳에서도 쉽게 시간을 잃게 만든다. 어느 날 나는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움을 삭히는 시간, 다른 사람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는 시간, 자기 전에 떠올린 수치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휴대폰에게 시선이 맡겨버린 시간이 정말 많았다는 것을.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미움에게 시간을 빼앗겨 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혼돈 속에서 우리는 창의적인 생각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타인을 위할 수 있는 눈을 잃고, 자신에게 뻗을 손을 움츠려 버린다. 탁해진 마음을 다시 정화하는 것에 온종일 시선을 빼앗기기 십상인 것이다.
미움은 안쪽을 향할 수도 있고, 바깥쪽을 향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두 곳을 동시에 향할 때도 있다. 미움이 이렇게 여러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미움이 기대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자신과 타인에게 걸어놓은 기대 말이다. 대체로는 두 곳에 모두 기대를 걸어 놓기 때문에 미움도 여러 방향을 향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도대체 어떤 기대를 왜 걸게 되었을까? 모든 수사가 그렇게 진행되듯이 우리는 각자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과거부터 뒤져봐야 한다.
모든 것을 믿는 순수함
아이는 연약하다. 처음에는 걸을 수도 없으며, 정체성을 가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아이에게는 보호가 필요하며, 부모들은 이를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많은 부모가 아이의 신체를 보호하는 것에는 성공하는 반면 정신적인 영역의 보호는 실패한다. 오히려 자신의 아이를 직접 파괴해버리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는 아이가 자신을 통해 뭔가를 쉽게 믿는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를 통해서 세상을 배운다. 부모가 가르치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처음에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삶의 올바른 이치로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올바른 이치를 바탕으로 아이들은 자신만의 기대를 만들어간다. 미움이 기대에서 피어난다는 앞선 설명을 따르면, 부모는 아이의 증오를 직접 키워줄 수도 있다. 유치원에 가보면 아이들이 각자의 기대대로 미움을 피우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숟가락을 쥐는 법이라던가, 장난감을 다루는 법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다. 각자 다른 부모가 알려준 ‘올바른 법’이 충돌해서이다. 이를 통해 미움이 기대에서 피어난다는 간단한 원리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아직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한 우리들의 생활 곳곳에서도 말이다. 사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사소한 기대는 그리 큰 문제로 이어지지 않는다. 정말 큰 문제를 일으키는 기대는 상처로 인해 만들어진다. 특히 남 탓을 잘하는 부모가 아이에게 화풀이하거나 홧김에 상처가 되는 말로 생긴 기대는 아이의 인생의 커다란 균열을 일으킨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분노와 알코올이 벤 목소리로 나에게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너 때문에 전부 엉망이 됐어”,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당시의 어린 나는 이 상황을 두고 어떤 생각을 해야만 했을까? ‘아버지는 감정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태어난 게 잘못이구나’라고 믿게 되었다. 그런 사건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나의 정체성은 점점 ‘무가치한 사람’, ‘사랑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타인이 좋아해 주는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이질적인 기대를 만들고 있었다. 물론 이에 발맞춰 이질적이 미움도 함께 말이다.
기대 그리고 실망과 자책, 분노
나의 무의식은 스스로에 대해서 ‘모자라고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애정결핍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질 나쁜 수치심을 가만히 두고 견딜 리는 없다. 수치심이 마음 깊이 자리하게 되면 자신에게 새로운 기대를 걸며 이미지 쇄신을 시작하는데, 보통은 자신이 느끼는 수치심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려 한다. 나의 경우는 유능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인정받고 누군가가 좋아해 주는 사람이고 싶어서 말이다. 이것이 내가 어린 시절을 ‘착한 아이’로 보낸 이유이다. 어린 시절에는 착하게 구는 것이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주변 어른들도 그렇고 친구들도 상냥하게만 대해주면 좋아해 줬다. 나는 ‘착하다’라는 타이틀을 굉장히 마음에 들었고, ‘이런 식으로만 살아가면 되겠구나!’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린 시절부터 남에게 맞춰주는 것에는 정말 전문가였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착하다는 것은 점점 매력점이 되지 못했다. 나의 주변은 맞춰주는 것보다 뚜렷한 개성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도, 사람들의 입장도 달라진 것이다. 그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어린 시절을 붙잡고 있었다. 여전히 타인을 맞춰주느라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나를 피하는 사람도 생겨났었다. 내가 애정을 달라고 보채고 있음을 눈치채고 부담감과 거부감을 느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상황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자 마음에는 미움이 피고 있었다. 자신에게 걸어 놓은 기대가 충족되지 못한 탓이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역시 나는 비참한 인간인 건가?’라며 자신을 미워하며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미워하는 대상이 타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엄청 애쓰면서 잘해주려고 노력하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원하는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나도, 사랑을 주지 않는 사람들도 미웠다. 즉 자신이 특정한 이미지로 보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동시에 타인에게도 기대를 품는 것이었다. 자신이 받기를 기대하는 애정은 결국 타인이 주는 것이었으니까. 이질적인 기대의 결말은 이질적인 미움이었다.
이타적인 이기주의자
정리하자면, 애정결핍을 가진 사람의 감정은 글을 잘 쓰기 위한 감정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성장한다. 글로 타인을 돕는 사람들은 타인을 위하되 자신이 원하는 영역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돕는다. 그러나 애정결핍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타인이 원하는 영역에서, 타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도움이 되려고 한다. 그렇기에 애정결핍이 타인을 도우려는 사고방식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없다는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애정결핍을 앓는 사람이 글을 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타인이 보내는 시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에게 걸어놓은 기대와 미움을 벗어버리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충동과 맞서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