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상황에서 거절할 수 있는 용기
과거의 나는 착한 사람이었다. 누군가 부탁을 하면 그저 들어주고, 남들이 보기에 좋은 일만 하려고 했다. 착하게 살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러기로 했다.
언제부터 나는 착한 사람으로 살아왔던 것일까?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먹었던 것일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이 떠오른다. 어른이 되고 나니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희미해졌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8살의 나는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새로운 경험들을 많이 했다.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으며, 새로운 장소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것들을 배워나갔다.
언젠가의 하루는 같은 반 친구가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친구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선생님이 친구의 뺨을 때렸다. 어린 시절, 8살의 나에게는 그 장면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그 일을 겪은 뒤로 잘못을 하면 뺨을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렇게 나는 8살을 기점으로 착하게 살기로 했다.
이러한 경험이 무의식에 계속 남아 있기 때문에 성장해가면서도 그저 착하게 살아갔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저 착하게만 살고 싶었다.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줬다. 부탁을 들어주니 그 부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착하게 사는 것에 싫증이 났다. 나는 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가? '나'보다 '남'들을 우선하며 사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지금 이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들이 생겨났다. 해외여행을 가서도 다른 사람의 선물부터 고르는 나를 발견했다. '나'를 위한 여행이었지만, 그 속에 '나'는 없었다.
더 이상 착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부탁을 하나 둘 거절하기 시작했다.
원치 않는 자리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과감하게 벗어났다. 기분이 상쾌했다. 말 한마디면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니. '남'들을 위해 살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은 다르겠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남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그런 문화이기에.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문화이기에. 하지만 자신을 뒤로하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면 악순환의 고리는 반복된다.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부탁을 하거나 들어줄 때도 서로가 진정으로 원할 때야 좋은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거절하지 못하여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부탁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대부분 좋지 않을 테고, 부탁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지금의 나는 거절을 꽤나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웬만하면 부탁을 잘 들어주지 않는 강철 방패가 되었다. 내가 원할 때에만 행동하고, 원할 때에만 만남을 가지니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모든 자리에서 이렇게 행동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래도 마음가짐을 바꾼 뒤부터는 대부분의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인생의 많은 부분들이 긍정적으로 변했다. 내 인생을 조금 더 주체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착한 사람이기도 하고, 착한 사람이 아니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내 모습은 달라진다. 우리가 상상 그 이상으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모든 상황에서 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화의 상징,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라 할지라도.
뭐, 좋은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알게 뭐람.
그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환경에서 스스로가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