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랑 카푸치노 꼭 마셔야 할까
수업이 끝나면 커피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고 고심해서 고른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커피를 품평하는 것이 우리의 루틴이 되었다. 또한 학원에서 식당까지 내가 운전해 가곤 했는데,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혼잡한 도로를 벗어나면 친구는 한적한 도로 한편에 차를 세워주고 나에게 운전을 맡겼다. 그럼 나는 뻥 뚫린 대로에서부터 운전을 시작한다. 아빠와의 주말 특훈 때문이었는지 아무것도 없는 운서동의 도로는 식은 죽 먹기였다. 커피 친구 역시 내가 운전에 자신감이 붙은 것 같다고 했다.
학원에서도 나를 포함한 수강생들은 제법 에스프레소 만들기에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능숙하게 원두를 담고 자신감 있게 버튼을 눌렀다. 커피 만드는 일은 사실 기계가 전부 해냈지만, 기계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낸 것은 큰 성과였다. 하지만 라떼 만들기가 시작되면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스티밍이라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우유를 뜨겁게 데우는 동시에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라떼의 포근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스팀기가 고압으로 뿜어내는 뜨거운 연기는 위협적이었다. 사방으로 뜨겁게 끓은 물이 튀었다. 특히 치익치익 빠르게 증기를 뿜어내는 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거칠고 사나웠다.
하지만 에스프레소 만들 듯이 버튼 하나 누르고 저 멀리 도망가 있을 수가 없었다. 대신 우유가 든 저그를 들고서 그 안에 노즐이 수면에 나올랑 말랑한 높이를 유지하며 천천히 저그를 내려줘야 했는데, 조금만 빨리 내려서 노즐이 공기 중에 모두 노출되면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뜨거운 물에 놀라 큰 화상으로 이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안전하게 우유에 노즐을 담가 둔다면 라떼거품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손을 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스테인리스 저그가 뜨거워질 때쯤에야 레버를 내릴 수 있는데, 그 과정을 겪을 때 드는 생각은 거품이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보다는 달궈진 스댕 저그에 손바닥이 달라붙진 않을지, 거품이 끓어 넘쳐서 손이 데진 않을지 같은 공포감이었다. 이것 역시 왜 인간 손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노즐이 알아서 길이를 줄이며 일정한 속도로 올라가면 될 텐데. 그러나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커피 자판기의 절반 크기도 안 되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몇백만 원에 달하는 고가의 물품이라는 걸 알고 나면 쓸모없는 질문이다.
하는 수 없이 부글부글 차오르는 뜨거운 스팀밀크를 태연하게 견뎌내며 스티밍 실습을 했는데, 나보다 겁이 많은 수강생도 있었다. 그 수강생은 어찌나 두려움이 많은지 스팀기의 위협적인 소리 때문에 너무 긴장해서 맨손으로 달궈진 노즐을 잡으려고 한다거나, 아니면 저 멀리 떨어져서 저그에 노즐을 다 담그지도 않고 레버를 올릴뻔한 적도 있었다. 우악스럽게 터지는 스팀 발사 소리에 몇 번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까지 했다.
남들 눈에는 유별나 보이는 이 장면이 나는 낯설지가 않았다. 우유 스티밍은 곧 잘 태연하게 해냈지만 내가 정말 무서워하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달궈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고기를 굽는 일이다. 두부를 부치는 일이다. 냉동 만두를 튀기는 일이다. 사실 후라이팬 공포를 완벽하게 극복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유난히 성능이 좋은 가스레인지 대신에 인내심이 필요한 인덕션을 쓰고나서부터 큰 맘먹지 않고도 요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내가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싶게 만든 날이 있었다.
안개인지 해무인지 미세먼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야가 하얀 연기로 꽉 막힌 날이었다. 나는 오히려 창문을 활짝 열고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은 몽롱하고 고요한 기분을 즐겼다. 이런 날은 세상도 조용했다. 며칠 전에 마트에 가서 장을 봐온 게 생각났다. 바베큐용이라고 적혀있는 두툼한 돼지고기였다. 바베큐용이라는 부위가 따로 있는 게 아닐 텐데, 고기의 정체가 무엇일까? 고민했지만 부위가 적혀있다고 해서 내가 뭘 알겠는가. 동네 주변에 캠핑장이 워낙 많아서 이렇게 판매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고기를 구워 먹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원룸에서 고기를 굽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프라이팬에 고인 뜨거운 돼지기름이 폭탄이 터지듯 팔과 얼굴을 향해 무차별한 공격을 펼칠게 두려워서였다. 결국 나는 며칠을 고민하며 냉장고에 쟁여만두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 갇힌 것 같던 날 어쩐지 용기가 생겨서 자신감을 가지고 냉장고에 모셔둔 바베큐용을 꺼냈다. 그리고 인덕션에 프라이팬을 올렸고, 두툼한 돼지고기를 올렸다. 나는 긴팔을 하나 챙겨 입고 안경을 쓰고 집게와 가위를 들고 최대한 길게 팔을 뻗어서 뜨겁게 기름에 튀겨지는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두려워했던 것과 다르게 기름은 아침 조깅하는 사람처럼 여유롭고 차분하게 튀어올랐다. 손에도 한두 방울 기름이 튀었지만 놀라서 뛰어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겁나던 일도 몇 번 반복되자 익숙한 일이 되었다. 우선 위협적이던 소리에 익숙해지고, 연기에 익숙해지고, 사방으로 튀는 뜨거운 물정도는 손등에 닿아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겁 많던 그 수강생도 몇 번 주춤거리다가도 뜬눈으로 스팀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 버튼만 누르던 우리는 스팀밀크의 등장으로 라떼와 카푸치노까지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커피 바리스타에 조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