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추워
커피 내리는 법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운전 연수를 받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가야 할 장소가 있다는 것과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침체된 영종도 살이에 활력을 주었다. 그러나 한번 올라간 감정은 꼭 그만큼의 높이로 내리막을 타곤 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자 새로움은 사라지고 다시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변함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정체된 기분을 털어내려고 금홍 염전으로 산책을 나갔다.
금홍 염전은 이름처럼 염전으로 쓰이진 않고 대신에 금빛 갈대 무리의 서식지로 쓰이고 있었다. 거기에 발을 들이면 바람에 따라서 갈대들이 사근사근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쯤 되면 취직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아무래도 취직하기 싫다는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을 채우던 시기에 자주 이곳을 찾았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커피학원을 다니는 처지. 수업을 듣는 건 좋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해결되는 건 아니기에 불안과 답답함은 여전했다. 회사원이 되기 싫은 거면 커피 만드는 법을 배워서 카페에 취직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러면 안 되지 싶었다. 지금까지 남들보다 잘 벌고 잘 살기 위해 볼품없는 인생을 살았는데, 그렇게 마무리하면 안 되지 하는 생각. 분명 퇴사를 결정할 땐 논할 가치도 없는 의견이었는데, 회사를 나온 지 반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야 힘을 얻고 말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금홍 염전은 너무 추웠다. 해가 없으니 마음을 어루만져줄 따뜻한 금빛은 찾을 수 없었고 바닷바람에 치여 지쳐버린 시들고 마른 갈대만 보였다. 나는 패딩 주머니에 쑤셔 넣은 두 손을 꺼내지도 않고 뒤돌아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메고 온 가방에는 며칠 전 주문한 작은 텀블러가 있고, 그 안에는 벤치에 앉아서 마시려고 준비한 따뜻한 커피가 담겨있지만 커피 몇 모금으로 추워진 마음이 풀리진 않을 것 같았다.
날씨도 그랬다. 짙은 구름은 머리 위에 자리를 잡아서는 지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한 두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추운 날씨에 집까지 꼬박 30분은 걸어야 하는데 비라니. 자포자기한 상태여서 비를 피하겠다고 걸음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걸으면서 느린 음악을 들었다. 하늘은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굵은 빗방울을 떨어트리다가 빗줄기를 쏟았다. 검은색 롱 패딩은 번들번들하고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가방의 지퍼 틈으로 빗물이 스몄다. 주말에 성급하게 비니를 세탁기에 돌려버린 게 후회되었다. 비니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줄어들어서 다신 쓰지 못하게 됐다. 부지런히 머리와 얼굴에 흐르는 비를 털었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비 오는 날 자동차 와이퍼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물개처럼 번들거리던 패딩은 바다에 빠진 쓰레기 봉지처럼 숨이 푹푹 꺼지기 시작했다. 내가 봐도 내 모습이 걸어 다니는 대형 쓰레기봉투 같다는 생각에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묵묵하게 걷느라 삼십 분이 꼬박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난방을 뜨겁게 올렸다. 히터를 켜서 축축한 발을 덥혔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면서 ‘이왕 비가 올 거면 따뜻한 커피가 내리면 좋을 텐데’ 하는 웃긴 생각도 했다. 그럼 주머니에 에스프레소 잔을 넣고 다닐 텐데.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소파에 앉았다. 며칠 전에, 얼른 여름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미지근한 공기에 시원하게 쏟아지는 차가운 여름 비가 그리웠는데, 너무 간절하게 바란 나머지 이런 비가 내렸나 싶더라. 가방을 열어 텀블러를 꺼냈다. 빗물이 새어 들어가 표면이 미끄러웠다. 뚜껑을 열자 내내 갇혀있던 열기가 훅 올라왔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에 좋은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