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커피 학원에 가는 버스를 제시간에 탔다. 쪽지시험을 준비하느라 프린트물을 넘겨보며 가는데 평소처럼 멀미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나서 핸드폰으로 몇 글자 적으려니 그제야 익숙하게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프린트는 넘기는 시늉만 하며 허투루 보고 있었나 보다.
간만에 보는 시험이다. 졸업을 하고 나서 시험이라고 볼만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입사시험이나 영어 말하기 시험을 제외하면 정말 오랜만이었고, 특히나 무언가를 암기한다거나 적어서 쓰는 시험다운 시험은 벌써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 되었다. 나는 시험이 주관식이겠거니 생각하면서 객관식이면 좋겠다고 은근하게 바랬다. 그리고 시험지를 딱 받아 들었을 때 동그랗고 작은 원에 숫자가 들어가 있는 걸 보고 즐거워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지선다도 아니었고 사지선다였기 때문에 3개를 고르시오 같은 복수 선택 문제도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쪽지시험 후에 바로 카푸치노와 라떼 만들기 실습으로 넘어갔다. 카푸치노를 주방 테이블에 서서 만드는데 허리랑 다리가 아파왔다. 안 그래도 어젯밤에 무릎뼈가 너무 시려서 담요로 무릎을 덮은 다음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실습은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다리가 아픈 것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이었다. 처음 내린 에스프레소 한잔과 우유 거품 한잔을 가지고 여러 번 재활용해서 가짜 카푸치노를 만들었다. 몇 번이고 커피를 빈 통에 부었다가 다시 따랐다가 하는 식으로 아무도 마실 수 없는 카푸치노가 몇 번씩 재현되었다. 우유 거품과 에스프레소는 섞일 대로 섞여서 편의점에서 파는 커피우유 색으로 변했고, 그 둘을 분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리 따르고 저리 따르느라 흘러내린 커피 우유에 손과 잔이 온통 끈적끈적했다. 책상 위에도 우유를 붓다가 흘러넘친 잔해로 난장판이었다. 테이블마다 커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걸 닦는 하얀 행주도 커피우유색으로 물들었고 교실 안은 온통 커피와 우유가 섞인 달달하고 비릿한 향으로 가득 찼다.
카푸치노 만들기에 중요한 건 거품이었다. 적당한 크기의 동그란 우유 거품이 컵의 중앙에 와야 하는데, 내 건 만들 때마다 조금씩 틀어져 있었다. 그걸 고치고 고치는데도 예쁜 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내가 보기엔 다 예쁜 원이었는데, 선생님이 오며 가며 하나 둘 고쳐줄 때마다 내 원은 부족한 원이 되었다. 카페를 차리고 싶다는 마음이 슬슬 사라졌다. 손님이 많은 카페라면 한두 시간은 이렇게 꼼짝없이 서서 커피를 만들어야 할 텐데, 혹시라도 단체손님이 카푸치노를 주문하기라도 한다면 기절할 노릇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메뉴에 카푸치노는 올리지 말아야지. 좋지 않은 몸 상태에 그날 수업이 끝나고 나는 어느 때보다도 지친 상태였다. 나와는 다르게 커피 친구는 오늘 수업이 가장 재미있었다며 들떠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원래 운서까지 곧잘 넘어가던 커피 친구가 오늘은 약속이 있다고 말하는 탓에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할 걸 생각하니 막막했다. 한때는 기꺼이 걸어가던 길인데, 모자도 없고 장갑도 없고 히트텍도 없고 무릎도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야 할 것 같았다. 아침부터 멀미를 했던 터라 버스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는데. 조금 시무룩해져서 학원을 나왔는데,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호의에 익숙해져 불편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싫기도 했다. 항상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감사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가 이젠 감사할게 없어지니 도리어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다행히도 가는 길에 나를 내려주겠다고 해서 커피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편하게 왔지만 차문을 닫으면서 감사하다는 말 대신 다음 주에 보자는 말이 먼저 나왔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했고, 오늘쯤에는 빨리 취업자리를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도 했고, 그래서 매번 수업을 듣고 커피 친구랑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가는 일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고 생각도 했지만, 다시 혼자가 된 기분에 허전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집주인에게 계약을 연장할 생각이 있냐고, 그러면 좋겠다고 문자가 왔다. 원래 계약대로라면 한 달 후에 방을 빼야 했다. 굳이 4개월 단기 방을 구한 것도 2월쯤이면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면 서울 어디쯤일 테고, 직장에 맞춰서 거주지를 구할 생각이었다. 집을 구 할 시간까지 계산해서 한 달의 여유를 두고 3월 말이면 충분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듯이 내 계획은 전부 틀어졌다. 생각처럼 취직이 빠르게 되지 않았다. 아무와도 교류하지 않고 지내려던 계획과 다르게 커피를 같이 마실 수 있는 친구도 생겼다. 달리 갈 곳도 없어 마음을 다잡고 조금만 더 머물자고 생각을 한터라 두 달만 더 살겠다고 말했다. 집주인은 ‘그럼 그러세요.’라고 문자를 마무리했다. 나는 마땅히 답할 말이 없어서 ‘네 감사합니다.’ 하고 답했다. 앞으로 세 달은 더 머물게 될 방의 문이 열렸다. 어제 치워둔 탓에 온통 하얗고 텅 빈 방이 나를 맞이했다. 등 뒤로 현관문이 닫혔고, 나는 신발을 신은 채로 현관에 그냥 가만히 서있었다. 이곳은 내 안식처일까 아니면 나를 가두는 우리일까. 얼마 남지도 않은 귀한 돈을 내고 머무는 곳이니, 안식처인 게 분명한데 왜 이렇게 쓸쓸한지 모르겠다. 혼자 사는 집 현관에서 잠깐 멈춰있던 적은 살았던 모든 집마다 한 번쯤 있던 것 같은데, 오늘은 그 잠깐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마침 초인종이 울리고 내가 시킨 죽이 배달 왔다. 아저씨는 벨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가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의심스러웠는지 다시 뛰어와 또 벨을 눌렀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이 벨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매번 ‘벨 누르지 말고 문 앞에’를 요청하곤 했는데 오늘은 그 벨소리가 고마웠다.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참 신기한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