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소녀 실패기
화요일은 삼일절로 휴강이었다. 목요일이 되어 학원에 가자 ‘화요일에 쉬니까 일주일이 너무 길었어.’ 이렇게 말하는 수강생이 있었다. 그분은 수업 중에 가장 대답을 잘하고 질문도 잘하며 다른 수강생이 실습을 할 때도 꼭 한 번씩 말을 걸어보는 열정 있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어린 수강생들의 무심한 대꾸에도 항상 밝은 기운을 잃지 않고 명량하게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가끔은 대단하고 가끔은 안쓰러워 보였다.
수업은 마지막을 향해 차근차근 넘어가더니 어느덧 실기 시험을 연습하는 곳까지 왔다. 실기 시험은 10분 안에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카푸치노와 라떼를 만들어내는 것. 제비뽑기로 번호표를 뽑고 한 명씩 강의실 앞으로 나가서 연습 시험을 봤다. 12명 중 12번을 뽑은 나와는 다르게 열정 있는 수강생은 1번을 뽑았다. 명량했던 평소의 모습이 긴장감에 굳은 것 같았다. 에스프레소 추출 버튼을 누르고 마음속으로 초를 세면서 허둥지둥 행주를 가져다가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바쁜 손이 가져온 것은 항상 엉뚱한 행주였다. 커피 추출 도중에 주변 작업대를 정리하는 것 또한 평가 항목 중 하나였다. 때문에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테이블에 흘린 커피가루를 치워야 했고, 제조한 커피를 잔에 담은 뒤에는 튀거나 흘러넘치는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티가 나지 않도록 닦아내야 했다. 말고도 여러 과정 중에 행주가 필요했다. 잔의 물기를 닦는 행주, 포터 필터의 커피가루를 닦는 행주, 스팀 노즐을 닦는 행주, 컵에 묻은 커피를 정리하는 행주 등 용도가 각기 다른 행주가 여럿이었으니 헷갈릴 만도 했지만, 꼭 테이블 닦는 행주가 아닌 다른 것을 집어서 테이블을 닦았다.
몇 번의 지적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자 새 행주를 가져다주던 선생님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모든 행주로 한 번씩 테이블을 닦고 나서야 실습이 끝이 났다. 열정 있는 수강생은 빛나던 자신감을 잃은 것 같았다. 테이블을 닦아내는 행주질은 능숙한데 비해 왜 자꾸 잘못된 행주를 집는 걸까 속으로 생각하며, 가까운 행주로 손을 뻗을때마다 제발 아무것도 닦지 말라고 차라리 가만히 있으라고 말리고 싶었다.
실습이 끝이 나고 나와 커피 친구는 행주 소동을 벌인 명랑소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커피 친구와 명랑소녀는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고, 그녀는 자기 자식뻘 되는 커피 친구에게 말 붙이기를 좋아했다. 그날 있던 행주 소동에 스스로의 실수를 멋쩍어하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집에서 유튜브 강의를 찾아들었다고도 말했다. ‘영상에서는 커피가루를 손으로 털어내더라고. 근데 나는 그게 비위생적으로 느껴지는 거야.’ 위생에 신경 써서 커피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단 사실을 우리에게나마 이해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커피 친구는 말없이 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다. 둘 다 공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커피 친구는 화물 비행기가 들고 나는 걸 검사받는 일을 했고 아주머니는 공항 푸드코트에서 일하시던 분이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일을 그만두셨다고 말했다. 푸드코트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듣자 손에 밴듯한 그 행주질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엔 엄마들이 식탁을 닦는 모습을 떠올렸는데, 아무래도 그것보단 손이 빨랐다. 아주머니는 우리랑 헤어지기가 아쉬운지 이 수업이 끝나면 뭘 들을 거냐고 물어보았고 일을 그만두었던 동안에 얼마나 많은 걸 배웠는지 이야기해줬다. 영어, 중국어, 캘리그래피 등 나열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아주머니는 흥미를 보이는 커피 친구에게 영어는 어떤 유튜브 강의를 들으면 좋다고 추천까지 해주셨다. 아주머니는 아파트 이웃주민인 커피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둘이 번호를 교환하는 와중에 아주머니의 핸드폰에 전화가 울렸고 ‘막내아들’이라는 이름이 찍혀있었다. 전화를 받는 그 모습을 보는데, 우리들 중 누구보다 학생 같고 소녀 같으면서도 가장 엄마 같고 그래서 정말 아줌마 같은 그 모습이 한 데로 섞여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전화도 번호교환도 다 마치고 나자 아주머니는 옆에 서있는 내가 민망할까 봐 마지못해 내 번호도 알려달라고 물었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아마 나에게 평생 연락하진 않을 것 같았다. 길 한 복판에서 십 분가량 대화를 하고 나서야 헤어졌다. 우리는 불현듯 얼마 전에 찾아갔던 카페의 사장님을 떠올렸다. 그 사장님과 아주머니가 친해진다면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