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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Oct 17. 2022

이름을 걸고


    동네에 이름을 건 카페가 몇 군데 있었다. <김종수 커피>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가끔은 로고에 캐리커쳐 얼굴을 넣어서 도대체 김종수가 누구길래? 하는 궁금증을 자연스럽게 해소시켜주었다. 그 정도로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인진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커피에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그중 한 곳을 커피 친구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 편의상 김종수 커피라고 부르겠다. 그곳은 동네를 오가며 항상 궁금했던 곳이었다. 명장이 아니고서야 실명을 가게 이름으로 쓰는 건 무모한 짓 같았는데 그 자신감이 부담스러워서 차마 발길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김종수 카페에서는 마침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판매하고 있었고 웬만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로스터리 카페는 차리지 말라며 우리를 말리던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러자 동네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그 카페가 더욱 궁금해졌다. 커피학도인 우리는 호기심과 약간의 사명감으로 김종수 커피를 찾아갔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건 원두 이름이 현란하게 적힌 메뉴판이었다. 글자가 너무 많아 눈이 돌아갔는데 그 옆에 매겨진 가격도 한몫했다.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무엇을 마실지 한참을 고민하던 우리를 보고 김종수로 보이는 사람이 무슨 커피가 마시고 싶냐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깔끔한 커피, 과일향이 나는 새콤한 커피 아니면 구수하고 진한 커피? 원두 이름에 압도된 우리를 보고 질문을 좁혀왔지만 정작 문제는 쌀국수로 점심을 배불리 먹은 후에 어떤 종류의 커피가 땡기는지 나도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수업에서 들어본 원두 이름을 찾아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로 내린 커피를 주문했다. 그건 스페셜 원두만 모아둔 메뉴판에 따로 적혀있었는데, 등급 때문인지 가격이 더 비쌌다.


    커피 친구는 자신이 커피를 배우는 학생이라고 슬쩍 말을 꺼냈다.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나와는 다르게 커피 친구는 방문하는 카페마다 그 멘트를 빼놓지 않았다. 백스테이지 접근권을 얻은 사람처럼 굴었다.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인데 카페만 오면 커피 배우는 사람인 티를 내고야 마는 게 웃겼지만 그 덕분에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카페 사장님들은 미운 놈 떡 하나 주듯이 원두 테이스팅을 하다가 시키지도 않은 커피 한잔을 내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관심 있게 어슬렁 거리는 우리를 애틋하게 여겨주었다. 그리고 김종수 사장님은 그 누구보다도 커피를 배운다는 사실을 기특하게 여겼고, 제대로 찾아왔다며 주방이 바로 보이는 바 테이블에 우리를 앉혔다.


    김종수 사장님은 우리가 주문한 커피를 내리는 건 뒷전이고 실력 테스트를 하기 시작했다. 실력이라는 단어도 과분한 초짜라는 게 밝혀지고 난 뒤에 사장님은 어쩐지 더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로스팅 전의 생두를 우리 손에 몇 개 쥐어주었다. 거기엔 수업시간에 그림으로 봤던 피베리도 있었다. 물론 강의실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병에 담겨있는 샘플을 구경했지만, 유리병 겉으로만 잠깐 들여다보고는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일반 원두랑 다르게 생긴 걸 확인할 수 있죠?’하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별 차이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손바닥 위에 올려진 콩을 만지고 굴리고 부셔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김종수 사장님이 건넨 콩은 저마다 생김새가 달랐다. 커피콩의 등급을 나누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는 크기인데, 크기가 다른 콩 세 개를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그제야 머릿속에 떠다니던 A등급 원두가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선 가라앉았다. 강의자료에서 본 커피체리 단면도에서 외과피, 펄프, 점액질, 파치먼트, 은피까지 겹겹이 쌓아 올라가는 단어들이 맥락 없이 어려웠는데 손에 쥔 원두를 부시고 그 안에 부서지는 얇은 껍질을 보자 모든 게 쉬워졌다.


    생두를 구경하는 사이 사장님은 우리가 고른 원두의 향을 한 번씩 맡게 하고는 드립퍼에 커피를 내려주었다. 각자 주문한 커피를 서로 맛볼 수 있도록 작은 종이컵에 나눠 담아주었다. 그때부터 곤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내가 시킨 커피는 맛이 있었는데, 친구가 시킨 커피에는 유난히 뜨거운 물을 많이 타셨는지 맹물처럼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사장님은 커피 맛이 어떻냐고 묘사를 해보라고 부추겼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플로럴하고 프루티 하다는 진부한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사장님은 학원에서 세뇌한 맛 평가에 이미 불같이 주의를 준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커피에서 오렌지 맛이 난다고 평하며 웃었고 사장님은 흡족한 듯했다. 그제야 그런 걸 과일향이 난다고 평하는 거라고 멋지게 포장도 해주셨다. 나는 위기를 잘 넘겼지만 커피 친구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맛을 새롭게 묘사할 말을 찾아야 했지만, 내가 맛본 것에 의하면 그 커피에선 맹물 맛이 났다. 친근한 사장님이라면 물을 너무 많이 탄 거 같다며 웃어넘겼겠지만, 프라이드에 가득 찬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당장 쫓겨날게 눈에 선했다. 안 그래도 주문한 커피를 받아보기 전까지 우리는 커피맛을 보는 올바른 방법에 관해 한바탕 강의를 들을 상태였다. 김종수 사장님은 다짜고짜 우리에게 쌀을 살 때 무엇을 보냐고 물었다. 커피 친구는 수확지를 본다고 말했고 나는 쌀 등급을 본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하자마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보고 쌀을 사보기는 했냐며 물었다. 쌀에 무슨 등급이 있냐고. 아마 김종수 사장님은 쌀의 포장지 디자인이나 저렴한 가격 같은 답을 말해주길 원했던 것 같다. 솔직하게 답하라고 해서 솔직하게 답했지만 그런 식으로 몇 차례 혼이나야 했다. 커피 친구는 알고 있는 형용사가 없는 사람처럼 맛 평가를 넘겨버렸다.


    김종수 사장님의 강의에 조금 지쳐서 말없이 커피를 마시자 궁금한 게 없냐고 물었다. 요즘 사람들은 뭐에 대해 배운다면서 정작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단골 멘트도 덧붙였다. 그건 학원에서도 질문 없으세요? 하고 받아온 질문인데 질문 후 돌아오는 꾸중 같은 답변이 듣기 싫어서 차라리 묻지 않는 습관이 생긴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갈등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인 마음이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기분 상해가며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여간 강의는 끝이 나질 않았고 오후에 근무가 시작되는 커피 친구의 출근시간이 점차 가까워져 왔다.


    결국 다른 손님이 들어와 김종수 사장님의 시선을 돌릴 때 우린 열심히 패딩을 걸치고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 때문에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빠져나왔다. 고마운 경험도 많이 했고 웃기도 많이 웃었지만 어쩐지 진이 빠지는 시간이었다. 커피 좀 마시게 내버려 두라고 할 수도 없었던 게 김종수 사장님의 커피 사랑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심 때문에 한낱 연고도 없는 생판 모르는 우리를 직접 주방에 데려와 커피를 한잔씩 내리게 해 주었다. 손님들에겐 비밀이지만 우리가 내린 커피는 라떼 두 잔이 되어 나갔다.

 

    우스갯소리로 여기에 우리 학원 선생님을 데려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학원에서 잘못 배웠다는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프라이드로 말할 것 같으면 학원 선생님도 부족하지 않았기에 두 세계관 최강자가 만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상상을 해본 것이다. 우린 재밌는 경험이었다고 입 밖으로 말했지만 두 번 다시 방문하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김종수 사장님은 조금 외로운 사람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아는 외로운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모두 타인에게 진심을 퍼주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 진심은 대게는 원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 실망하고 내어주길 반복하면 결국 외로운 사람이 된다. 김종수 사장님의 가게에 유난히 단골이 많은 이유도 그런 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집에 와 냉장고를 열어보니 절반 정도 비운 쌀이 있었다. 이사를 와 식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겠다고 밥을 지어먹었는데 쌀 하나 고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격이 싼 것, 패키징이 예쁜 것, 어디서 들어본 이천쌀도 있었는데 내가 고른 건 4kg짜리 도정 백미였다. 저녁 지을 준비를 하며 쌀 봉투를 꺼냈다. 돌돌 말아 접힌 포장지엔 경기도 인증 특 1등급 백미라고 적혀있었다. 김종수 커피에 다시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한국인이 파는 상품에 등급 없는 거 본 적 있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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