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20대는 일정 시기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 세뇌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특정 나이까지 결혼을 못하면 '정상' 시스템에서 매장될까 두려워 상대에게 선택되길 바라며 나를 과대포장하고 진열하기에 급급했던 시간들이 20대의 시간들을 메웠다. 비단 내 삶뿐인가. 학생 때는 공부 열심히 하고, 결혼해서는 시부모님 잘 모시고, 삼시 세끼 요리를 잘 해내고, 집안 살림 척척 하면서 미모도 잃지 않으며 자식 교육에도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많은 여성이 배워왔다. 그래서 만삭의 배를 하고서도 밥을 차리고 집안을 치우고 가꿨으며, 아기를 낳고서는 다이어트에 몰두해 애 안 낳았던 사람의 몸처럼 돌아가려 애씀으로써 ‘정상 가족’ 신화가 지배하는 세상 안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욱여넣었다.
그런데 깊은 밤, 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나? 내가 원했던 삶이 이런 거 맞는지 왜 따져보게 되나? 가족들은 내가 돌보고 있는데, '나'는 누가 돌보고 있나? 24시간 깨어있는 상주 가사 도우미를 자처하며 세상이 주입한 ‘행복한 가정생활’ 시나리오에 따르다 보니 나 자신이 없어졌네.
이런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내가 향한 곳은 대형 쇼핑몰 문화센터였다. 거긴 나 같은 여자들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내 아줌마로서의 절망을 구원해 준 사람은 엄마도, 배우자도 아닌 바로 아줌마 친구들이었다. 문화센터에서 만난 아줌마들과 잠들지 않는 자식에 대한 고충을 나누고, 정신없지만 혼자가 아닌 점심을 함께 먹고, 어린이를 어떻게 하면 바르게 키울 것인지에 대한 팁들을 나누었다. 생각해 보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아줌마들이었다. 갱상도 산골에서 자라면서 유년기에는 엄마의 아줌마 친구들이, 결혼 후에는 나의 아줌마 친구들이 철철이 내 냉장고 야채칸을 빈자리 없이 메워주었다. 손재주 없는 나를 위해 봄에는 연근 조림을, 여름에는 복숭아 병조림을, 가을에는 사과 칩을, 겨울에는 고구마 말랭이를 만들어주는 사람은 부모님이 아니라 아줌마 친구들이었다. 남들은 고등학교 때 인생 친구를 만난다는데 내 인생 친구는 고교 동창이 아니다. 30대에 만난 아기 엄마들이다. 사심 없는 환대, 서로가 겪는 고통에 대한 깊은 친밀감을 나는 애 엄마가 되어서 오롯이 누리고 있다.
나는 20대에 첫째를 낳은 터라 기존 친구들 중 결혼하거나 아이를 가진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야근하는 배우자에 대한 분노, 출산 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몸무게, 갑자기 잃어버린 직장 생활자로서의 소속감, 잠 못 자게 하는 자식에 대한 애증에 대해 말할 곳이 없었다. 매일 밤 잠들지 않고 우는 자식을 보며 얼마나 무력감이 몰려오는지, 미혼 시절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갔던 날들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운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줌마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이런 음습한 고통이 고이지 않고 흘러갔다. 아줌마들에겐 겪어 본 고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이 있었다. ‘아침에 밥 다 차려놨더니 자식 녀석이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떼 써서 밥 싹 치워버리고 그냥 학교 보냈다’라고 하면 나의 아줌마 친구들은 ‘무슨 엄마가 그러냐’며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말은 절대 안 한다. ‘아이고 잘했어, 그놈도 한 끼 굶어보면 정신 차리겠지’한다. ‘우리 남편은 빨래 다 개서 서랍장 위에 올려놓기까지 해도 서랍 안으로 정리 한 번을 안 해’하면 ‘확 반품을 해버려야 돼, 그런데 생산공장에서 받아줄지나 모르겠네’한다. 이러면 웃을 수 있다. 지나치게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다. 자식을 똑바로 키우고 있는지에 대한 후회와 자책, 배우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나의 아줌마 친구들 사이에는 서로의 고통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수용이 존재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골계미, 해학, 그런 게 다 아줌마들에게서 나온 것이라 확신한다. 이런 공감의 웃음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실질적인 힘이 된다.
‘아줌마’가 되기 전엔 내 이야기를 잘 못 했다. 도움이 필요해도 도와달라는 말을 못했다. 누가 봐도 아줌마가 된 지금은 도와달라고도 잘하고, 도와주기도 잘한다. 놀이터에서 모르는 애 엄마가 애를 못 달래서 쩔쩔매면 멀리서도 달려가 같이 어릿광대가 되어 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항상 제일 마지막에 내리며 마지막까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려 준다. 가방에는 사탕 대여섯 개를 항상 넣어 다닌다. 언제든지 같이 노는 어린이들과 나눠 먹일 수 있도록.
내 자식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여자들, 키웠던 여자들, 키울 여자들 모두 나의 잠정적인 친구이자 동료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고 느끼던 나에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은 바로 아줌마들의 포용력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든지 내가 받았던 것을 척척 내어주고 싶다. 그들의 잠 못 잔 나날들과 아기를 안고 업느라 혹사당한 무릎과 어깨를 진심으로 위로하여주고 싶다. 그들이 찡그린 얼굴로 유아차를 밀며 놀이터에 도착했을 때 나의 그늘을 내어주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아줌마’는 흔히 멸칭으로 쓰이지만, 어떤 여자든지 돕고 싶고 나의 친구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 마음은 아줌마가 되고 나서 생긴 넉넉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