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아니 친부의 집은 제사가 일 년에 14번 있었다. 설, 추석 빼고 열네 번이다.
나의 조부는 1930년대에 태어났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 자수성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찌감치 법무사 자격증을 따 지방의 돈을 쓸어 모았다고 한다. 그가 서른이 되자 이미 이 지방에서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집을 나갈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조부는 조모와 금슬이 아주 좋아 아들 셋에 고명딸을 낳았다. 요리 솜씨가 탁월해 명절에는 그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조모의 부침개 한 점이라도 얻어먹으려 안달을 냈었다 한다. 성정이 차갑고 모진 사람이었던 조부는 자식에게도 사랑을 주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처, 조모만 사랑했다. 체구가 작고 웃으면 볼우물이 팼다는, 동그란 얼굴을 하고 항상 머리를 단정히 쪽 찌고 다녔다는 그녀는 내 아버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원래도 매몰찼던 성품의 조부는 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자식들은 하나같이 직업도 변변찮았고 아버지 같은 수완도 없었다. 자식들이 눈에 차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던 조부는 자신에게 있는 많은 돈으로 자식들과 며느리를 좌지우지했다. 첫째 며느리는 아침을 6시에, 점심을 11시 반에, 저녁을 5시 반에 시간을 정확히 지켜 8첩 반상을 매번 다르게 차려내야 했다. 자식이 서른이 넘어서도 밤 9시 이후로는 외출하지 못하게 금족령을 내렸다.
나의 엄마는 둘째 며느리였던지라 조석 공양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매달 이어지는 제사를 모시러 퇴근하자마자 눈썹 휘날리게 본가로 뛰어가야 했다. 그러고도 눈총을 받았다. 여자가 무슨 일을 한다고 매번 제사 음식 장 보는 데에 동참하지도 않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얼굴을 내미는지, 원. 하며 혀를 차는 집안 어른의 이야기를 면전에서 들은 적도 있다고 했다. 어쨌든 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당시 초등학생이었으므로, 며느리들의 고충이 고통스럽든 말든 마당이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곤 했다.
문제는 내가 중학생이 되던 때부터 발생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던 해, 직장에서 퇴근하고서야 제사 음식을 하러 가는 일이 눈치 보였던 엄마는 엄마의 빈자리를 내가 대신 채우고 있기를 종용했다. 약한 불로 부쳐야 하는 명태전부터 시작해서 고구마전, 육전, 배추전, 동그랑땡을 밀가루에, 계란물에 담갔다 빼서 줄지어 기름을 둘러 부쳐 노릇해진 것들을 대바구니에 올려 한 김 식혀 두었다. 꼬치에 두드린 육적을 구워 뀄다. 제사 닭을 우묵한 프라이팬에 오래 올려 간장에 조렸다. 약불에 오래 올려놔야 안 타고 구워지는 두꺼운 두부를 프라이팬에 얹고 있으면 엄마가 퇴근해서 왔다. 엄마는 화장실 갈 새도 없이 바로 앞치마를 두르고 삼색 나물 만들기에 돌입했다. 그렇게 7시가 될 때까지 제사 음식을 마무리하고 나면 모양이 예쁜 것들을 종류별로 조금씩 빼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먹을 상에 올리고, 우리는 그 곁에 작은 상을 펼쳐 모양이 어그러져서 제사상에 올리기 어려운 음식들을 모아 저녁밥을 먹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사촌언니는 이미 작년부터 제사음식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련의 제사를 챙기는 과정이 이상하다고 생각지 못했다. 고 3 때도 예외는 없었다. 제사음식을 저녁까지 만들고 자정까지 모의고사를 시간 재서 풀다가 자정에 제사를 지내고 어른들이 먹은 음식을 치우고 우리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것은 할아버지 집의 막내 손자가 고등학생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을 때부터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의례히 하기 마련이었던 송편 빚기에도 ‘쟤는 아직 어리다’는 말로 빠지기 일쑤였던 귀한 막내 손자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누가 전을 부치다 기름 물이 튀어 화상을 입든 말든 자기 방에서 조용히 공부만 했다.
내가 직장을 갖고 나서부터는 연차를 쓰고 제삿날 내려오라고까지 하진 않았지만 명절 전날만큼은 아무리 출장을 가고 격무에 시달려도 하루 종일 명절 음식 장만에 참여해야 했다. 아침부터 두 명의 사촌 언니, 숙모, 작은 할머니, 엄마는 비장한 얼굴로 앞치마를 동여매고 줄지어 앉아 프라이팬을 이리저리 주고받으며 온갖 전을 부치고 또 부치곤 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그놈의 멧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니 기분이 참 좋았다. 배우자가 4대째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를 안 지낼 줄 알았던 거다. 제사를 지내든 안 지내든 친지들 모인 자리에서 먹을 명절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 어찌 몰랐을꼬. 며느리가 되면 더 눈치 보며 일해야 할 줄은 어찌 몰랐던고. 친가 쪽 며느리들은 연차를 쓰고 나보다 더 일찍 와서 전을 부치고 있었던 걸 왜 기억하지 못했던고.
만삭 때도 앞치마를 두르고 쭈그리고 앉아 새우를 튀기고 명태를 계란물에 묻혀 부쳤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해 왔던 일이라 시어른들께 책 잡힐 일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해야 하나. 음식 하는 건 어차피 나도 먹고 내 자식들도 먹일 거니 하는데, 남의 집 부엌에서 익숙하지 않은 동선으로 일 하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내 집에서 내 멋대로 음식을 만들어가면 좋겠는데 '가족의 화합'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지 좁은 부엌에서 며느리들이 뜨거운 기름 튀겨가며 어색하게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해야 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을 보자면 애가 둘이 되고 보니, 애 보는 것보다 명절 음식 하는 게 차라리 편하다. 애들이랑 배우자를 놀이터로 몰아내고 고소한 기름 냄새 풍기면서 전 부치는 명절의 시간. 9년 차 며느리로서 이젠 어머니가 다음 할 일을 예측해서 보조만 잘하면 된다. 애 볼래 밭 맬래 하면 밭 맨다더니. 어떤 노동 및 고통이든 차등이 있는 거니께.
돈 열심히 벌어서 다음 명절엔 제수비 대신 커다란 식기세척기 한 대를 시가에 들여놓고 싶다. 그러면 뒤돌아서 웃는 사람 나 말고도 있을 텐데.
대한민국에 명절 좋아하는 여자/며느리는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듯하다. '시어머니가 용돈 주면서 해외여행이나 다녀오래 호호' 이런 이야기, 아기 낳을 때 하나도 안 아팠다는 이야기랑 비슷한 류로 들린다. 나는 영 못 믿것네.
아이고. 명절이고 뭐고 얼릉 지나가버렸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