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초반, 술 참 많이 마셨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겉멋으로 낮부터 반주를 하곤 했다. 밤새 마시고 해장하러 가서 아침술을 시킨 적도 있다.
나만 그랬으랴. 같이 대학생활하던 동기들과 그런 일상을 매일 공유했다. 어제는 내 자취방에서 마시고, 오늘은 옆집 애 자취방에서 마시고, 내일은 학과 총회라서 마시고.
술자리를 갖는 게 어른의 상징 같아서, 미성년을 벗어났다는 증명 같아서 일부러 더 그악스럽게 마셨던 것 같다.
지금은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지만 내 20대는 싸이월드에 사진을 올리고 퍼가고 했다(퍼가요~♡←이 댓글 이해하는 사람 있겠지). 싸이월드 사진첩을 복구시켜 보니 온통 술 마시고 찍은 사진들 뿐이었다. 술잔 들고 짠하는 사진, 준코라는 안주 엄청 많이 나오는 술집에서 안주 찍은 사진, 잔디밭에 술 깔아놓고 그린호프라고 설명 달아 놓은 사진... 많이도 마셨다. 길바닥에 쓰러져 동기들한테 업혀서 집에 들어가고 필름도 끊기고 그랬는데 큰 일 겪지 않은 걸 보면 다만 운이 좋았다.
30대를 넘어서면서 내가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고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란 걸 마침내 알게 되었다. 나이 드는 것의 장점은 내가 정말로 뭘 좋아하는지. 남들 따라 좋아했던 건 아닌지, 싫어하는 건 왜 싫어하는지 잘 알게 된다는 점 같다.
요즘은 특별한 날ㅡ친구 생일이나 모임 회식ㅡ이 아니면 술을 잘 안 마신다. 그래도 여전히 술자리는 좋아해서 여건만 되면 마다 않고 나간다. 젊은이 감성 해방의 시간이니까.
얼마 전에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상반기 일정 마무리 겸 회식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저녁 시간을 비워 술집에 모였다(우리독서모임 사람들은 다 3~40대 기혼 유자녀 여성이다). 테이블에 앉는데, 그 넓은 공간에독서모임 사람들 말고는 우리또래 여자가 진짜 한 명도 없는 거다. 나와 비슷한 세월을 살아낸 이들, 내 대학 동기 같은 이들, 술 잘 마시고 잘 놀던 그 여자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밥 먹을 때마다 당연히 반주를 시키고, 저녁에 만나면 새벽 5시까지 놀았던 그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우리는 쑥스럽게, 여기서 우리가 나이 제일 많은 거 같네, 하면서 웃었다.
저녁 7시에 술집에 앉아 술 시키는 사람은 모두 20대 젊은이들뿐이었다.
오랜만에 술이 좀 들어가니 마음이 울렁거리며 막 혼자 서글퍼졌다. 나도 평소라면 애들 밥 먹이고 치우고 씻기느라 쩔쩔매고 있었겠지. 애들 쉬 닦아주고 책 읽어주고 식탁 밑에 흘린 밥풀을 기어 다니며 줍고 있었겠지.
지금 내 삶에서 저녁 7시쯤 밖에 나와 논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 혹은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일이 있다. 큰애 유치원 운동회 때 일이다. 공 굴리기 하고 줄다리기하고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땀 뻘뻘 흘린 큰애한테 물 먹이고 있는데, 사회자가 이번엔 부모님들 댄스 타임을 갖겠다는 거다. 80년대 테크노 음악 빵빵 나오고 미러볼 돌아가고 난리가 났다. 나는 혹시나 댄스 신고식에 지명될까 봐 구석에 숨어 떨고 있었는데 자진해서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순간 연예인 콘서트 온 줄 알았다.
댄스 타임 전에 봤을 땐 평범한 아줌마 아저씨들이었는데 화려한 조명 아래서 춤추는 모습을 보니 당장 팬클럽 결성해서 쫓아다녀야 할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춤을, 그냥, 말도 못 하게 추는 거다. 무슨 음악이 나오든 기깔나게 맞춰서 허리 돌리고 다리 돌리고 브레이크 댄스까지 나왔다. 생수병 뽑아서 물까지 뿌리고 관객들(?)은 그 물 맞으면서 다같이 미쳐 날뛰었다. 그루브라는 게 폭발하는 시간이었다.
그때 너무 신선한 충격을 받아서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원래 운동회는 엄마 아빠 스트레스 푸는 날인 거 몰랐어? 하는 거다.
아. 그런 거였구나.
20대 때 그렇게 잘 놀던 사람들, 춤 잘 추고 술 잘 먹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 엄마 아빠가 다 되어서 운동회 댄스타임에서야 그 한을 푸는구나.
댄스타임에서 섹시와 코믹을 기가 막히게 섞은 커플댄스를 춰서 제일 오래 박수갈채를 받았던 부부가 애 셋을 여기저기서 찾아 손잡고 집에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렇게 잘 노는 사람 처음 본다. 때로 애들 재우고 둘만의 댄스파티를 열었던 걸까. 호흡이 저 정도로 척척 맞다니.
참.
어릴 때 잘 놀았던 사람들 다 살아 있구나. 수면 위로 올라올 기회가 없었을 뿐.
애 키우고 일하느라 수면 밑에서 숨죽이고 있는, 끝내주게 잘 놀고 흥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둘째 운동회 땐 나도 흥이란 걸 좀 폭발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또 그렇게 놀겠냐고.
앞으론 기회가 왔을 때 괜히 빼지 말고 제대로 놀아보고 싶다. 그러고 나면 또 오래, 내가 잘 아는 일상을 살아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