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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Dec 03. 2023

주인공이 아니라도 괜찮아

내가 1년 중 가장 기다리는 순간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바로 내 생일.     

생일은 공식적으로 저녁 외출을 할 수 있는 시간, 음주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그 날 만큼은 아이들 씻기고 저녁 챙겨 먹이느라 바빴던 시간을 훌훌 털어버리고 밤거리로 나선다. 손수건, 물티슈, 뽀로로 비타민 같은 거 없이 빈손으로 나선 길은 발걸음조차 가볍다.


생일이 다가오면, 누구와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세세하게 계획을 짠다. 계획 광인답게, 엑셀로 표를 그려 정리해볼 때도 있다. 또, 만나야 될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도록 미리 요일별 약속을 잡는다.

생일 한 주 전이 되면 배우자에게 내 생일 만남 계획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여 야근 계획을 조정해 둔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게 무지 조심한다. 아줌마들의 약속은 아무리 미리 모든 조건을 맞춰 놔도 아기가 아파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되니까.     


작년 내 생일엔 코로나가 심해 우리 집에 친구들을 불러 골뱅이 소면과 막창과 치킨을 사 와 온갖 술을 섞어마셨다. 말하다 힘든 사람은 누워서, 누워있다 다시 힘 난 사람은 앉아서 안주와 소맥을 흡입하며 거의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해 생일엔 무엇을 할까.     


이번엔 탱글탱글한 면발에 데리야키 양념이 잘 스며 볶음우동이 안주로 나오는, 새벽 3시까지 하는 작은 술집에 가고 싶다. 기본 안주로 나온 녹미채도 새콤 짭짤하니 밥 비벼먹기 딱 좋았지.

술을 잘 못 마시는 나로서는 안주가 깔끔하고 맛있게 나오는 술집이 좋다.

그리고 2차는 무조건 가는 데가 있다. 마음씨 좋은 사장님이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는 골목 깊은 곳에 위치한 술집이다. 사장님이 요리 금손이라 어떤 메뉴를 시키든 실패가 없다. 그 중에서도 먹태 구이가 단연 일품이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메뉴인데 바삭하기 이루 비길 데 없고 깊은 감칠맛이 난다. 마요네즈와 청양초와 간장을 섞은 그 집만의 특제 소스도 일품이다. 배가 터질 듯 불러도 먹게 되는 맛. 먹태도 찍어먹고 기본 안주로 나오는 튀긴 건빵도 찍어먹는다. 생각하니 침이 고인다.    


그리고, 선물.

생일 세 달 전부터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사는 게 나을지 남에게 선물 받는 것이 더 기분 좋을지를 꼼꼼히 따져서 생일 리스트를 정한다.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을 근간으로 하여 면밀히 생각하고 기록해 둔다.

지금까지 기록된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면으로 된 폭닥한 파자마

- 알로카시아 그린벨벳 화분

- 품이 넉넉하고 따듯한 맨투맨 티셔츠

- 노랑색 폰 케이스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 선물을 받으며 기뻐할 나의 모습. 밤나들이를 나가서 소맥을 마시며 떠들 나의 모습! 생일 즈음 날씨를 고려하여 무슨 옷을 입을지 코디까지 생각해두었다.  잠 안 오는 밤이면 눈을 감고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흰 티셔츠에 갈색 슬랙스를 입을까? 그 위에 조끼를 덧입을까? 걷기에 어떤 옷이 편할까? 술 흘려도 티 안나는 색깔이 좋겠지, 하면서 혼자 웃곤 한다.     


그런데 요즘 저녁 모임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모임이 재밌고 멤버가 좋아도 새벽 1시쯤 되면 잠이 쏟아진다는 거다. 모든 일정을 조율해 애써 밤에 나와도 1시가 넘어가면 집에 가서 애기 뒤통수 냄새 맡으면서 자고 싶다. 생각보다 밤잠 문제가 심각해서, 밤 약속이 잡히면 안 자던 낮잠을 억지로 청해서 자기까지 한다. 그래도 자정을 넘어가면 급격히 체력이 하락하며 집에 가고 싶어진다.

또, 기껏해야 1년에 서너 번 술을 마시니 주량이 영 줄어든 것도 문제다. 얼마 전에 와인 반 병을 혼자 마시고 만취해서 다음 날 숙취로 너무너무 괴로웠다. 기분을 한껏 내서 과하게 술을 마다음날은 침대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아이구, 아이구 소리만 내게 된다. 그런데 아기 엄마란 직업은 연차 개념이 없기에 숙취로 기어 다니면서도 밥을 차리고 애 등교시키고 집안일을 해야 한다. 나는 숙취를 못 이기는 시간이 너무 싫다. 밤 약속 이후에도 내 일상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좋다.      




대학생 때까진 인간관계에 서툴러서 생일 때만 되면 긴장했다. 아무도 내 생일을 챙겨주지 않을까 봐,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아줌마가 된 지금은 아무도 내 생일을 모르면 먼저 얘기한다. 일주일 뒤에 내 생일인데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리고 자식들한테도 한 달 전부터 주지 시킨다. 곧 엄마 생일인 거 알지. 축하 댄스 준비해줘.   


어렸을 때도 그냥 먼저 생일이라 말하고 같이 맛있는 거 나눠먹고 그랬으면 됐을 걸. 생일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 혹은 스스로를 생일에도 축하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여겨서 생일 즈음엔 꼭 우울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요즘엔 서로의 생일을 꼭 축하해주는 친구 2명을 만나서 내 생일 누가 알아줄까 걱정덜었다. 사실, 공식적인 저녁 외출 일정이 생기는 게 너무 기뻐서 서로의 생일을 애타게 기다린다고 하면 너무 염세적인가? 아줌마 세계에선 회식 같은 공식 저녁 일정이 생길 리 만무하니까. 저녁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날은 참으로 드무니까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각자의 생일이 있는 달이 오면 회비를 모아 코스요리가 나오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둔다. 약속 당일이 되면 단톡방에 꺅, 드디어 오늘 저녁이야, 지금 밥 다 했어, 이제  나간다, 택시 탔다, 이런 대화가 오간다. 약속 장소에 나가려고 택시를 잡아 타는 순간,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엄마로서 어른으로서 이고 졌던 걱정 불안 애증 같은 것들을 택시에 훌훌 벗어놓고 내린다. 그리웠던 얼굴들과 마침내 만나면 이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고민 없이 하고 싶은 말 실컷 하는 시간, 지극히 사적인 시간을 가진다. 해방의 시간이다.

5시간 넘게 떠들어도 헤어질 땐 늘 아쉽다.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전화로 더 얘기하자 한다.


생일 얘기하다가 밤 외출 이야기로 샜다. 결국 나는 특별히 사랑하는 두 친구를 만나 밤거리를 걸으며 맛있는 걸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가 보다. 갑자기 생일 생각이 난 걸 보니.


벗들 단톡방에 오늘 혼자 마실 별빛 청하 사진이나 올려야겠다. 랜선으로나마 수다 떨면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시겠지. 하. 언제 다음 생일이 다가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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