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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작자 Oct 22. 2023

출근하다가 울어본 적 있나요_2탄

퇴사일기

11월이 오고 있다. 10월인 요즘도 아침에는 찬 공기가 옷 사이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벌써 아침 산책 횟수가 줄고 있다. 낮아진 기온에 몸에 적응이 필요해서 그렇다고 적응이 끝나면 다시 부지런히 산책을 나가겠노라 애써 스스로를 수비 중이다.


정직한 내 몸이 찬 공기를 대하면 목(인후)이 가장 먼저 반응한다. 어김없이 목감기를 한번 앓는데 시초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칼칼한 목이다. 이제는 목감기가 오기 전 익숙하게 자가치료를 시작한다. 집에 있는 생강차와 정수기에서 나오는 45 °C 물과 친해질 때이다. 그래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 다면 약간의 약물이 필요하다. 며칠 전 아침 산책길에 약국에서 산 목 아플 때 녹여먹는 약과 목에 두르는 가제수건으로 버티고 있은지 4일째이다.


아침 산책이 시작된 건 몇 개월 되지 않았다. 5월부터 새로 다니는 회사에 재택근무 포지션으로 입사를 하면서부터였다. (출장을 가는 날을 제외하면 거의 집에서 일한다)이제 회사에 "다닌다"는 말이 사실상 맞지 않는 말이 되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부족한 걸음 수를 채우고자 걷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점심에는 밥을 차려먹느냐 바쁘니까, 오후에는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 하니까 아침밖에 없었다. 출근하는 시간 대신 그 시간을 걷는 것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2000보, 조금씩 걷다 보니 이제는 4000보 정도 가뿐하게 걷는다. 무엇보다 혼자 걷는 게 좋아졌다.

아침 산책을 한다고 하면 정말 부지런하다는 반응이 있는데 결코 그런 거 같진 않고 그저 타이밍이 잘 맞았던 거 같다. 날씨가 한 몫한 탓도 크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5월부터 9월을 가장 좋아하고 이 때는 컨디션도 좋고 좀 생기가 있는 편인데 마침 그런 계절에 산책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오월 어느 날부터 시작된 산책길, 처음엔 눈곱만 대충 떼고 밖으로 나가는 게 좀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도 집에 돌아와서 땀을 씻어내는 게 상쾌한 편이라 일어나서는 최소한의 절차(화장실 한번, 물 한 잔 그리고 한 개의 인공눈물)만 마치고 나간다. 산책 가는 길의 차림은 별 고민 없이 결정된다. 트레이닝복 혹은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나이키 캡모자를 눌러쓴다. 준비물은 최대한 가벼워야 해서 스마트 워치를 손목에 차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케이스를 뺀 핸드폰을 작은 크로스백에 넣어 들고나간다.


누가 봐도 출근하지 않을 것 같은 옷차림으로 지하철 역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안양천 산책길로 이어지는 길로 걸어갈 때 하나 둘 걸어 나오는 역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한 때 출근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마음의 소리가 절로 난다.


아득한 풀출근의 기억 속에 임신 후반기의 출근길은 고난 그 자체였다. 때는 2019년 11월, 코로나가 오기 전 회사의 모든 직원들은 매일 같이 회사로 모여들었다. 지금은 재택근무가 너무나 익숙하지만 불과 4년 전만 해도 "재택" 근무는 특정 소수만이 할 수 있는 낯선 개념이었다.


힘들었던 시기의 감정은 기억나지 않아도 기억 그 자체는 남는다. 고작 서울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주제에 거창하게 "역경"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고 싶은 출근의 기억이 있다. 이 사람 과장하네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주로 고난과 역경을 거쳐 결말에 다다르며, 우리는 그 값진 결말을 보고 나서야 영화관을 나온다. 길과 지하철과 또 길을 거쳐 우리는 회사에 다다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값을 치러야 회사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는 게 그냥 힘든 나 같은 사람에게 그것도 임산부의 몸으로 하는 "출근"은 이미 근무의 시작이자 노동현장이었다. 이를 닦고 엉성한 자세로 서서 세수를 했다. 옷을 입고 무언가를 입에 넣고 현관문을 나선다. 임신 32주, 내 배는 어떤 중년아저씨보다도 불룩했고 걸음은 역으로 향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느렸다. 11월이 되자 레깅스에 임부용 옷을 걸치고 오버사이즈로 입던 코트를 드디어 제 옷 처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미안하리만큼 그 시절 자아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혼자 정말 이 거리에서 내가 가장 구리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팔다리는 그대로인데 튀어나온 배를 들고 계단을 오를 때며 숨이 차서 몇 번을 쉬었다. 임신으로 몸이 변하자 일상도 변했다. 모든 것들이 전보다 힘들었다. 그리고 적응이 쉽지 않았다. 샤워를 하다가 서서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 발이 보이지 않는 생애 첫 주기였다.


추울 때 임산부들이 아마 가장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은 두툼한 레깅스에 상의가 길어 엉덩이를 가릴 수 있는 것이다. 임산부 티를 너무 내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를 갈 때는 레깅스 위에 꾸역꾸역 뷔스티에 원피스를 걸쳐 입고 다녔다. 그리고 가끔 낮은 워커도 신었다. 그럼에도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11월 초가을, 아침 공기는 차갑기 그지없다.

지난 밤에 감은 머리를 묶고 어그적 어그적 걷는다.

신혼집은 지하철 역에서 걸어서 15분이 걸리는 곳에 있었다.

집을 구하러 갔을 때 네이버지도로 역에서 얼마나 걸리는지 찍어보기까지 했고 역까지 걸어가기 꽤 먼 거리였지만 집이 마음에 들어 운동할 겸 괜찮을 거라고 긍정의 프레걸임을 씌운 채 계약을 했다. (그때는 임산부로서 출퇴근하는 미래의 나는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

출산휴가를 들어가려면 11월을 꼬박 채워 출근해야 했다. 마지막 출근 날은 11월 29일 금요일까지였다. 휴가를 야금야금 쓴 탓이었다. 얻지 못하는 것에 간절해진다고, 회사와 집에서 쓰는 달력에 매일매일 출근 없는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엑스표를 치기 시작했다.  

무거운 배 무거운 마음을 들고 매일 1호선에 올라탔다. 그중 다행으로 회사가 환승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곳에 있었다.


11월 어느 날, 그날따라 앉을자리가 없어서 손잡이를 잡고 계속 서서 가고 있었다. 메스꺼움이 올라오더니 점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안될 거 같은 순간까지 참다가 지하철 문이 열리자 그냥 내려 버렸다. 아직 몇 정거장을 더 가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가운 바깥공기를 맞으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무거운 백팩을 옆에 내려둔 채 좀 쉬었다. 휴지통에 머리를 박을 만큼 심각한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출근해야 할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당시 팀장님한테 급한 대로 문자를 보내고 속이 잦아들 때까지 시간이 흐르게 두었다.


지하철을 몇 번 보내고 다시 지하철에 올라탔다. 다행히 사람이 많이 줄어 들어서 전보다 쾌적한 열차에 빈자리에 가 앉아 다시 출근을 했다. 열차는 마지막 고비를 향해 달렸다.  승강장에 내려 지하도를 거쳐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걸어가야만  출근이라는 노동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노약자/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매표소로 올라간다. 교통카드를 찍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지하도에서 지상으로 가는 길에 약간의 경사가 언제부터인가 산을 올라가는 것처럼 힘들게 느껴졌다. 경사가 끝나면 바로 계단이 이어지는 난코스였다. 매표소를 빠져나온 사람들이 어느새 나를 앞질러 가고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최대한 느리게 걸어갔다. 누군가 내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것보단 그 편이 나았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지상이다. 아까보다는 덜 차가운 공기가 엄습한다.


이렇게 회사건물에 도착하면 가짜 노동이 시작된다. 11월이 되자 사실 상 할 일이라고 할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인계를 거의 다 준 탓에 하루 한 시간이면 할 일을 최대한 천천히 했던 거 같다. 그래도 일하는 것처럼은 보여야 했기에 아웃룩을 켜놓고 마우스에 손을 올린 채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신 말기, 나는 아마 출근하는 길 어귀에서 눈물을 몇 번 닦았던 거 같다.

그때의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질에서 나온 분비물로 팬티는 젖어있기 일쑤였던, 걸음은 거리에서 가장 느렸던 나에게,


"이제 출근 안 해, 조금은 즐겨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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