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일터는 여의도에 위치한 병원이었다. 서울의 가장자리에 살던 나는 동네에서 105번 버스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261번 버스를 갈아타고 병원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간호사로 일하던 병동은 삼교대로 돌아갔는데 매달 수간호사 선생님(수선생님, 수간으로 불렀다)이 근무표를 짰다. 근무표(번표라고 부름)는 10개의 쉬는 날(off)과 6번의 Night(밤근무) 번 근무(이틀 연달아하고 월 3번)가 거의 고정이었고 나머지 보름 가량은 Day와 Evening 근무로 채워졌다. 매달 근무표에 따라 내 생활이 돌아갔다.
회사원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지 않기에 때때로 늦잠을 자고 때때로 늦게까지 놀고 출근할 수 있었다. 평일에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개인적인 용무가 있는 경우 낮시간을 이용하기에 좋았고 체력만 된다면 밤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해서 여행을 갈 수도 있었다. 다만, 이 모든 좋은 점을 깨달은 건 나중에 회사원이 되고서였다.
그 시절 나는 교대근무의 단점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주말, 그것도 토요일 낮,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적어도 일하러 가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내 여리디 여린 행복지수는 뚝 뚝 떨어졌다.
상대적으로 더 나락으로 가는 시기도 있었는데 벚꽃축제와 불꽃축제가 열리는 때였다. 여의도에 있는 병원이라 버스는 늘 한강다리를 건넜는데 벚꽃이 한창일 때는 벚꽃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도가 가득 찼다.
출퇴근길에 벚꽃도 보고 좋은 거 아닌가 할 수 있겠지만,
물론 벚꽃 자체는 좋은데 빌어먹을 상대적인 것이 문제였다.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걷고 있는 사람들은 지나 내달리는 버스 안에서 내 마음엔 쉰 바람만 날렸다.
저 놀고 있는 무리에 들어가지 못할 바엔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스물네 살이었다.
"오늘 같이 일하는 선배는 불편한데, 일만 해야겠네 ,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몇 명이 입원을 하려나, 응급실에서 환자가 오려나, 호스피스 병실 환자는 괜찮나
내 뒤에 근무자가 누구더라...."
이렇게 버스에 앉아서 한 겹 한 겹 걱정을 쌓고 있으면 버스는 늘 병원 앞 정류장에 도착해 문을 열고 나를 병원으로 들이밀었다.
마음은 이미 지옥이었지만 1층 외래를 거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탈의실로 간다. 탈의실에서 동기라도 만나면 그래도 한숨을 트고 병동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한 달에 여섯 번은 밤근무를 위해 저녁 8시에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탔다. 저녁 출근은 몇 달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밖은 늘 컴컴했고 매일 듣던 노래도 밤 버스 안에서는 흥이 나지 않았다. 버스가 달리고 걱정도 내달렸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상황들을 생각해내다 보면 어느새 지옥(병원) 앞 정거장에 도착한다.
비라도 오거나 생리 전 증후군이 엄습한 날은 버스에서 눈물바람이 된다. 속으로 연신 출근하기 싫어, 출근하기 싫어 되뇌면서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1년 동안 출퇴근을 하며 모은 돈을 갖고 귀여운 첫 차를 질렀다. 운전을 배우고 혼자 첫 출근 하던 길은 아직도 아찔하다. 다행히 차로 출퇴근을 하면서 우는 날이 줄어갔다. 운전에 집중해야 하기도 했고 차 안에서는 좋아하는 노래나 라디오 방송을 크게 틀고 오직 들리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그렇게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맞아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을 듣게 되는 날은 웃기도 했다. 출근길에 오직 출근이라는 이유로 우는 날은 더 이상 없었다.
밤에 차 안에서 바라보는 동부간선 도로는 정적이다. 앞에 가는 자동차들의 붉은 후방등과 줄지어 늘어선 가로등 그리고 커다란 초록색 표지판들만이 제 존재를 나타낼 뿐이다.
어딘가 침잠하는 길이 이어진다. 오직 음악만이 동적인 그 공간 안에 내가 듣고 있는 노래만이 생동한다.
어느 날은 노래를 듣다가 혼자 따라 부르기도 했다. 가장 많이 듣고 따라 부른 노래는 Adele의 곡이었다. 슬프고 아련한 마음을 담담하게 불려내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녀의 목소리 울림이 내 마음을 토닥거려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출근길 메이트(mate)에게 눈물대신 목소리를 내어주고 3년을 더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