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초대
일상으로의 초대는 그때그때 생각을 적어보는 글입니다. 특별한 체계도 없고 형식도 없고 발행 주기도 없습니다. 분량도 제멋대로이고 다소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정돈되지 않았더라도 날것의 저를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해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필독서라는 이름으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엄청나게 재미없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찌나 필독서인지 기억력이 나쁜 저조차도 E.H 카라는 특이한 이름을 기억합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유명한 말은 기억이 납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생각해보니 당연했습니다. 당시 저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알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제 무엇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시절에 있었던 일을 모두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가는 선택해서 기록할 수밖에 없으며, 당연히 역사가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대부분 그 시절 왕과 잘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고, 보통 사람들의 역사는 "백성들이 굶주렸다", "태평성대였다" 정도의 짧은 진술로 끝나게 됩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것을 온전한 사실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 만큼, 역사는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해석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조금 커서 생각해보니 모든 역사에 조금 의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희한하게 새 왕조가 들어설 때는 항상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왕의 횡포가 끝이질 않고", "민심이 뒤숭숭한" 상황인 것입니다. 너무 어린 시절 배워서 자연스럽게 왕조가 망할 때는 망할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든 왕조가 새로 생길 때마다 그 전의 모든 왕조가 타락했다는 것은 무언가 조금 이상합니다.
어린 시절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백제의 삼천궁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었다는 말을 듣고 배신감이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뛰어내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이상합니다. 충신의 아이콘인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절에 감탄을 했지만, 어차피 망해가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를 죽인 이방원에 대해 나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그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훌륭한 랩 배틀이 있었다는 기억만 남았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세력을 잡은 사람의 역사가 되는 것이 맞지만, 그 승리를 미화하기 위해 날조를 하는 일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패배자의 입장은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패배한 것도 서러운데 모든 것이 다 패배할만하게 잘못했었고, 승리자는 모든 것이 옳다는 식의 역사가 남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비열하게 승리한 자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영 탐탁지 않습니다. 이러한 역사만 남는다면, 이 세상은 승리를 위해 어떤 짓을 해도 일단 승리만 하면 정당성이 확보되니 말입니다. 역사의 포커스가 패자보다 승자에 맞춰지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승리만 하면 모든 잘못이 감춰진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하려 드는 사회가 되는 것은 좋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역사가 아닌 지금 사회도 일단 승리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부정한 수단으로 출발해서 재벌이 된 기업의 부정이 드러나도, 이미 국가 산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을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기업가에게 부정한 방식을 택할 경우 회사가 클 수 있고, 이를 택하지 않을 경우 다른 부정한 기업 때문에 망하는 상황이 온다면 부정한 방식을 택하는 사람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을 "관례"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 때문에 사회는 서로 약점이 얽히고 얽혀 누구의 잘못을 묻기도 애매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승리자만이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역사를 알고 있다면 무조건 승리를 위해 매진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진실은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라는 말은 거짓인 것 같습니다. 어떤 역사가가 과거 역사를 연구하며 당시 승리자가 사실은 부정했다는 것을 여러 연구로 밝혀낸다 한들, 그 역사가 주류가 되어 모두에게 알려지기는 어렵고, 일부에게 야사로만 남을 뿐입니다. 백 년 후에 국민의 힘당을 계승한 정권이 주류가 되어있다고 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도탄에 빠지고 파탄이 난 최악의 시대로 설명할 것이며, 민주당을 계승한 정권이 주류가 되어있다고 하면, 전염병과 자연재해 같은 국난에도 불구하고 잘 극복한 시대로 설명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역사 기록은 어떤 방식으로 될지 흥미롭기도 합니다. 과거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영상 및 글이 생겨났고, 이는 푸코 같은 문헌 덕후가 와서 분석을 한다 해도 전부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빅 데이터 분석 방식이 더 정교해지면서 역사적 흐름을 컴퓨터로 분석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그렇게 분석한 역사는 조금 더 공평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