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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철학] 왜 사는가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by 평범한 직장인

살면서 한 번쯤 자살을 생각해본 사람은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살을 생각할 때는 아마도 삶이 너무 힘들 때일 것입니다. 삶이 너무 힘이 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그 정도로 힘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공감하기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힘든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살자를 이해하고 애도합니다. 그러나 단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죽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왜 사는지 참 모르겠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이유는 죽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으면 끝인데, 도대체 나는 왜 살아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이러한 허무함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으로 종교가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종교들은 죽은 후의 세계를 알려주며, 바르게 살지 않으면 죽은 후에 큰 처벌을 당할 것을 설파합니다. 이러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바르게 산다면,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이로울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이익을 떠나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바르게 삶으로써 죽은 후에 좋다고 한다면, 그게 삶의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일까요?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은 삶의 의미가 없을까요?


저도 종교가 있지만, 종교적 가치가 삶의 의미를 찾아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죽은 후에 좋은 세상이 있다면 왜 이 삶을 살아야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고민한 것으로 알고 있고 찾아보았지만 딱히 제가 동의할 만한 뚜렷한 해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제 생각에 인간은 왜 사는지 모르면서 살려고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특히 우주에 대한 책을 보다 보면 더 한없이 의미 없이 작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왜 이렇게 큰 공간을 낭비하며 인간이 살아있는지 궁금해지고, 생물학을 보다 보면 정말 이렇게 신비한 구조로 몸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면서, 왜 이런 복잡한 존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또 듭니다. 정말 인간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혼란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로 행복을 많이 말합니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삶이 의미 있어지지는 않는 것 같으며,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의미가 없다고 얘기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유전자 전달, 번식을 위한 섹스도 역시 강한 삶의 동기가 됩니다. 많은 20대들이 섹스에 매달리고,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힘들어도 자식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전자 전달을 안 하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지 되묻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은 허무주의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인간들은 이러한 허무주의를 극복 중인 존재입니다.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어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철학으로 불리든, 고집 혹은 아집으로 불리든, 비정상적인 생각으로 보이든 다들 자신만의 생각의 구조에 살고 있습니다. 각자의 생각의 차이가 너무 크게 되면 사회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종교 혹은 교육으로 사회화를 시키게 됩니다. 현대의 학교는 매우 강력한 사회화의 수단으로, 종교보다 더 영향력이 커져 있죠. 하지만 학교 교육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도 있고, 아예 듣지 않는 사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들 각자의 생각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점점 사회의 변화가 빨라 짐으로 인해 세대 간의 격차가 커지게도 됐습니다. 아마 지금 30대 이상인 사람이 교과서를 보면 예전에는 배우지 않았던 내용, 바뀐 내용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만약 인류 전체에 공통된 확실한 삶의 의미가 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해진 가치에 따라 열심히 살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확실히 의미 없는 자가 되어 제거되거나 사회에 적응을 못할 것입니다. 이런 사회가 있다면 복잡한 생각을 잊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살 수 있겠지만, 그런 공통된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공통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부여했던 사회로 전체주의 사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 전체주의는 현대인이 생각했을 때 잘못된 삶의 의미를 주입시켰고, 이에 따라 지금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많은 착한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전체주의 사회에서 제시한 삶의 의미가, 의미 없이 허무주의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달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며, 힘든 삶에 아주 심플한 대안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사는지에 대한 해답은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당장 전쟁이 난다면 이런 한가한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삶에 매달리게 되겠지요. 전쟁이 아니라 단순히 내 몸에 작은 생채기 하나만 생겨도 난리를 치며 나를 보호하려 하는 것이 본능 같습니다. 삶의 의미는 모르겠지만 아픈 것은 싫고, 죽는 것은 더 싫습니다. 아마도 삶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본능적인 싫음을 넘는 아픔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살기로 한 이상 선택을 해야 합니다. 비록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허무하더라도 살기로 한 이상 모두 발버둥 쳐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 지는 모르겠으나, 살기로 한 이상 계속 판단을 해야 합니다. 나에게로의 초대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해답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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