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책을 찢어
아기는 6~7개월이 지나면 말은 못 하지만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먹기 시작한다. 너무 빠르게 구매해 놨던 장난감을 때리기밖에 못했던 아기는 점점 제대로 된 용도를 발견하며 놀기 시작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녀석은 절대로 꼽거나 정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기는 일단 무조건 해체하고 흩어놓고 나는 치우는 것이 일상이다.
생각해 보면 이는 자연법칙을 그대로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이 과학이 더 발달해도 절대로 깨지지 않을 법칙으로 꼽는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말이다. 흔히 무질서도로 번역을 하는데 이는 엔트로피를 꽤 쉽게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설명이지만, 본질에는 약간 어긋나 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 바란다.
https://brunch.co.kr/@gjchaos0709/284
여하튼 아기 한정으로는 엔트로피 증가를 무질서도 증가로 단순하게 설명해도 충분할 듯싶다. 각종 야채 모형을 뽑고 꽂을 수 있는 장난감을 주었을 때 열심히 이것저것 해보다가 뽑는 것까지는 쉽게 하는데 도통 다시 꽂는 건 가르쳐도 하지 않는다. 탑을 쌓아 놓으면 득달같이 기어 와서 무너트려 버린다. 아기는 하루종일 어지럽히고, 나는 다시 정리하는 것이 하루 일과다.
어쩌면 인간은 어지럽히는 존재로 진화해 왔을지도 모른다. 아기의 탄생 자체가 주변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며 엔트로피가 낮아진 사례이지 않는가. 사람의 신비하고도 복잡한 기능이 임산부의 몸 안에서 짧은 시간에 구성되는 건 엔트로피를 크게 낮추는 일이기 때문에, 주변 엔트로피는 더 크게 높아지게 된다. 태어난 아기는 행동도 항상 엔트로피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이 녀석은 본능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건가?
생물의 진화는 정합적이면서도 신비롭고 의문이 생긴다. 아직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론이지만 생물은 대체적으로 복잡한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이론이 있다. 생존에는 분명 덜 복잡할수록 유리해 보이는데 말이다. 도킨스의 주장처럼 생명체를 "유전자 전달자"의 시각으로 본다면, 유전자 전달에 유리한 쪽은 단순한 방향일 것 같다. 인간은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살기 힘든 걸 보면 그렇지 않은가. 요즘 대두되고 있는 탄소 문제도 지구 평균 온도가 2도 정도 높아진다고 난리다. 단세포 생물은 생명체가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온 적응의 왕인데, 왜 생물이 복잡하게 진화를 하는지에 대해 나로서는 아직 답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 조금 더 크면 아기는 정리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고, 힘들어할 것이다. 다 커서도 자취방에 발 디딜 틈 없이 늘어놓고 사는 친구들이 많은 것을 보면 정리는 본능적으로 하기 싫은 것 같다. 물론 가끔 정리에 강박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도 한다.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부터 보이는 것을 부수고 어지럽히는 아기는 육아 난이도를 올라가게 만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녀석은 날 닮아서 조심성이 많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일어설 수 있게 되면서 잡을 수 있는 물건의 범위가 넓어졌고, 걷기 시작하면 더 넓어질 것이다. 아마 그때쯤 되면 훈육에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도 안된다고 하고 뺏기도 하고 있고, 아기도 알아듣는 것 같지만 그럴수록 또 몰래하는 사람의 심리는 아기조차 그대로 가지고 있다. 말귀를 알아듣게 되면서 점점 사회화를 시키겠지만, 또 지금의 이 자유분방한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물건을 집어던지고, 팝업북에 사람 머리를 뽑고, 장난감을 내려찍는 모습은 계속 눈에 담아 두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어질러놓은 장난감을 닦고 정리하는 일이 싫지 않다. 정리를 마찬가지로 싫어하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