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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Sep 10. 2023

야근 정승

오늘도 막차를 타고 퇴근합니다.

“대훈님, 메일 보낸 거 확인해 보시고, 내일까지 자료 준비 좀 해줘요.”

오후 5시, 흥팀장이 아이들 때문에 일찍 퇴근해야 한다며 외투를 입으며 대훈에게 말했습니다.

“네, 팀장님. 확인해 보겠습니다. “

대훈이 대답하는 사이, 대훈의 아내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오늘도 늦겠지? “

“응, 오늘도 많이 늦을 것 같아.”

아내에게 카톡을 보내는 대훈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대훈님, 오늘도 야근해요?”

옆 팀의 팀장인 지영팀장님이 물었습니다.

“아, 네.. 아직 일이 남아서요.”

“그럼 우리 저녁 간단히 먹고 와서 야근할 건데, 같이 가요. 맨날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던데. “

윤석은 일이 있어 퇴근한다고 하여, 대훈은 옆팀 직원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전 직장에서도 야근 많이 했어요?

지영 팀장님이 대훈에게 물었습니다.

“아니요, 전 직장에서는 항상 정시퇴근 했어요. 사람들이 저보고 퇴근알람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대훈의 말에 지영팀장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와, 퇴근알람. 상상이 잘 안 가요. 여기 사람들은 대훈님 보고 야근정승이라고 부르는데. “


‘야근정승’

딱히 부인하기 어려운 그 호칭을 듣고 대훈은 지금의 상황에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흥팀장은 업무시간에 항상 자리를 비웁니다.

다른 팀장들과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대훈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대훈이 전 직장에서 팀장을 하던 시절에는 항상 본인의 업무를 팀원들에게 공유해 주었습니다.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회의를 했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있을지.

하지만 흥팀장은 항상 중요한 일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려주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면 자리로 돌아와, 업무시간에 시키지 못한 일을 시키곤 했습니다.

흥팀장은 항상 남성직원인 대훈과 윤석에게만 당연하다는 듯이 업무를 시켰습니다.




흥팀장은 노동조합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믹스커피를 마시는 흥팀장에게 노동조합 위원장이 물었습니다.

“새로 들어온 대훈이라는 직원은 어때?”

흥팀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며 대답했습니다.

”형님, 대훈이 그 새끼 연봉이 얼만지 알아? 형님 들으면 진짜 깜짝 놀랄 거다. 우리는 다 병신 취급받고 있는 거야. 새로 들어온 사람한테나 그렇게 대우를 해주고. 내가 어떻게 해서든 내쫓을 거야. 걱정하지 마. “

노동조합 위원장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어떠냐고 물었지, 내쫓으라고 말한 거 아닌데?”


노동조합 위원장이 자신 편을 들어주지 않자, 흥팀장은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나와, 흥팀장은 특유의 거만한 걸음걸이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며칠 전 박상무가 시킨 일을 대훈에게 메일로 전달했습니다.

“대훈님, 메일 보낸 거 확인해 보시고, 내일까지 자료 준비 좀 해줘요.”


알겠다고 대답하는 대훈을 뒤로하고 외투를 챙기며 사무실을 나서는 흥팀장은 생각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 또 한바탕 신나게 깨 줘야겠다.’




“대훈님, 오늘도 야근하셔야 하는 거예요? “

흥팀장이 퇴근하자, 윤석이 대훈에게 물었습니다.

“네, 팀장님이 시키신 게 있는데, 내일 아침까지 해야 할 것 같아요.”

대훈의 말에 유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습니다.

“왜 퇴근하기 직전에 일을 시키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루 종일 계속 자리 비우다 돌아와선 말이에요. 그래도 내일까지 하라고 하셨으니, 내일도 시간이 있잖아요. “

윤석의 말에 대훈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습니다.

“아시잖아요. 내일 아침까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훈의 말에 윤석은 뭐라 대답하기 어려워, 주먹인사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힘내세요.”


대훈은 그렇게 오늘도 야근정승이 되었습니다.

자정이 되면 대훈의 마음이 바빠집니다.

회사 앞에서 대훈의 집까지 향하는 버스의 막차 시간은 00시 11분입니다.

자정이 되면 사무실의 전등이 모두 꺼집니다.

그러면 사무실을 청소하시던 이모님께서 전등을 다시 켜며, 대훈에게 항상 같은 말을 건네곤 합니다.

“아이고, 오늘도 야근하고 계세요? 힘들어서 어쩐데? “

대훈은 웃으며 대답합니다.

“아, 곧 퇴근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대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11분 뒤에 출발하는 막차 버스를 타고 편하게 집에 가되,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할지?

아니면 교통비가 조금 더 들긴 하지만 일을 더 하고, 심야좌석버스를 타고 퇴근을 할지?


대훈은 자정이 넘은 이 시간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예전 직장에서 저녁 6시 30분이면 항상 칼같이 퇴근하면서, 직원들도 퇴근하라고 독려하던 몇 달 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 멀리 한강 올림픽 대로에도 차량 불빛이 적어지는 시간.

야근정승이 된 대훈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7편에서 계속)

* 이미지 출처 : '무한상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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