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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Sep 13. 2023

퇴직을 강요받은 뒤

악마가 발톱을 드러냈습니다.

"대훈님. 파견직 정리하는 건 어떻게 됐어요?"

다음날 출근한 흥팀장이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대훈에게 물었습니다.

"네, 팀장님. 파견직 현황을 확인해 봤는데, 아직 파견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분들이..."

"아니! 지금 누가 그걸 몰라서 묻냐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할 거예요?"

대훈의 말을 자르며, 흥팀장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원칙적인 이야기는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시켰으면 좀 하라고. 할 수 있는 방안이라도 연구를 좀 하라고!" 흥팀장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조금 더 확인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훈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팀장님. 파견직 정리하는 건 어떻게 되었나? 안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박상무의 말에 흥팀장이 답했습니다.

"아니, 대훈님한테 맡겨 놨더니, 전혀 진척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아침에 뭐라 따끔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박상무가 흥팀장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뭐야? 빨리 처리해야 하는 거 몰라?"

박상무의 불편한 감정을 읽은 흥팀장이 바로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니깐 말이에요. 어제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을 했는데, 혼자 착한척하고 있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사람을 잘 못 뽑은 거 같아요."

흥팀장의 이야기를 듣던 박상무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습니다.

"팀장님, 새로 뽑은 사람을 계속 쓸지 말지,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팀장님 선에서 처리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박상무의 말에 흥팀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김대훈. 너는 이제 끝났다.' 박상무 실을 나서는 흥팀장의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상반기 평가기간이 다가왔습니다.

흥팀장은 윤석을 가장 먼저 불러서, 티타임을 겸한 평가면담을 했습니다.

평가면담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윤석이 대훈에게 물어봤습니다.

"대훈님은 평가면담 하셨어요?"

"아니요, 팀장님께서 저한테는 아직 따로 말씀이 없으셨어요."

대훈이 답을 하며 보니, 팀원들이 한 명씩 흥팀장이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날도, 그다음 날도 대훈은 평가면담을 하지 못했습니다.


금요일 오후.

흥팀장이 대훈에게 물었습니다.

"대훈님, 오늘 오후에 뭐 특별한 거 있나?"

어느새 존칭과 반말을 섞어 쓰기 시작한 흥팀장이 대훈에게 물었습니다.

"아니요, 팀장님. 특별한 일 없습니다."

"요즘은 안 바쁜가 보네. 오케이. 이따 오후 4시쯤 잠깐 봅시다."

흥팀장이 뒤돌아서며 팀원 모두에게 들릴 정도의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집에 빨리 가고 싶어 질 텐데."


오후 4시.

흥팀장이 대훈에게 따라 나오라고 했습니다.

평소 가던 흡연장이 아닌, 회사 뒤편의 으슥한 곳으로 흥팀장은 앞장섰습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흥팀장이 물었습니다.

"회사 생활은 할 만하고?"

"네, 팀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계속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대훈은 흥팀장의 비위를 건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일을 못해? 그리고 회사가 배우러 다니는 곳이야? 일을 했으면 성과를 내야지? 안 그래?"

예상은 했지만, 대훈은 쉽게 대답을 이어가기 어려웠습니다.

한참을 몰아붙이던 흥팀장이 대화를 마무리하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대훈님이 이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아.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저, 어떤 선택을 말씀하시는 건지..?"

대훈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며 흥팀장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쪽일 하루이틀 한 사람도 아니고, 몰라서 묻는 거야?"

흥팀장은 절대 퇴직이라는 단어를 먼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는 표현을 극도로 자제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훈의 어려움을 철저하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네, 팀장님. 그러면 제가 조금만 생각해 보고 다음 주까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되도록이면 빨리 알려줘요. 나도 보고를 해야 하니깐."


면담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대훈은 윤석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대훈은 멋쩍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10편에서 계속)

* 이미지 출처 : '어쩌다 어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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