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마이클 잭슨'과 '비틀즈'의 LP를 듣는 사람이었다. 집이 쫄딱 망하기 전 우리 집엔 전축이 있었다. 아버지는 늘 장비들을 동원해 소중하게 전축과 LP를 관리했고 기분 좋은 주말이면 '카펜터즈'를 틀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팝, 록, 클래식의 영향을 무의식 속에 간직한 채 자란 나는 사춘기에 다다라 스스로 선택한 장르들을 더해 음악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력을 남긴 '서태지'의 존재는 음악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곧 그는 내 곁을 떠났다.
가족은 흩어져 살고 있었고,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서태지마저 은퇴를 선언,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속에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말 그대로 팀명이 ‘아이돌’인 고등학생 가수가 등장했다. 당시엔 미성년가수가 희귀했다. 나와 몇 살 차이 안나는 학생들이 TV에 나와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굳이 나누자면 0세대 아이돌이라고 하면 되겠다.
소녀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꿈을 보았다. 그들의 무대를 보기 위해 학교를 땡땡이치고 방송국 앞에 줄을 섰다.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꺄아꺄아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이름을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 무리 속에서 나는 미동도 없이 무대를 응시했다. 번쩍이는 조명과 심장을 때리는 음악소리에 매료되었다. 생전 처음 겪는 엄청난 자극이었다.
그때의 내 감정은 단순한 팬심이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그들에게로 쏟아지는 열정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무대 위에 내가 서있길 원했다. 저 환호와 관심과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 ‘나’ 이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갈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반짝하고 사라졌고, 곧이어 H.O.T가 세상을 정복했다. 나는 그들을 흉내 내는 것으로 나의 작은 학교를 정복했다.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 점점 더 신이 났고 유노윤호도 울고 갈 열정부자였던 나의 춤 실력은 쾌속발전했다. 스폰지 같은 흡수력이 있던 시절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댄스가 시시하게 느껴졌고 스트릿 댄스를 추는 크루에 들어갔다. 그곳의 언니 오빠들은 한국가요를 듣지 않았다. 질질 끌리는 커다란 힙합바지를 입고 '팝 음악'을 틀고 '힙합'이라는 장르의 춤을 췄다.
90년대 팝 음악계는 힙합과 알앤비의 전성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웨스트 코스트와 이스트 코스트가 서로 총질을 해댔고, 나는 투팍과 TLC, 로린힐의 음악을 들으며 뼈 마디를 꺾어댔다. '캘리포니아 러브'가 연습실에 흐르면 심장이 나냈다. 고교 3년 내내 장래희망 조사란에 ‘스트릿 댄서’라고 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꿈은 따로 있었다. 진짜 꿈은 ‘가수’였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말할 순 없었다. 외모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신랄한 얼평으로 일찍부터 외모자신감을 잃었던 나는 혹여나 비웃음을 살까 꿈을 숨긴 채 살아갔다. 그러던 중 춤으로 인기를 얻자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더 중요한 것은 2차 성징을 겪으며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외모에서 조금씩 엄마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콧대의 윤곽이 드러나고, 열심히 붙인 쌍꺼풀액의 위력으로 속쌍꺼풀이 생겨났다. 어느 순간 잘 꾸미면 꽤나 예쁘장한 축에 속했다. 조금씩 외모에 자신감이 생기자 봉인은 해제됐다. 나는 용기를 내어 가수를 꿈꾸기 시작했다. 연습실에서는 춤을 연습하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연습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채워나갔다.
당시에 박정현, 박화요비 등 실력파 알앤비 가수들이 국내에 출몰했다. 미국 음악시장의 컨템포러리 알앤비의 열기를 실시간으로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브랜디와 모니카’를 표방하는 여성가수들이 놀라운 실력을 뽐내며 등장했다. 나의 노래방 최애곡은 에코의 '행복한 나를'에서 '머라이어 캐리의 'Hero'로 바뀌었고, '더클래식'과 '공일오비'의 테이프 대신 '박정현'과 '박화요비'의 CD를 듣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진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그로 인해 사회구조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위기를 기회로'를 모토로 사는 아버지는 빠르게 영어교육 출판사업에 뛰어들어 착착 기반을 닦아가고 있었다. 나는 춤과 노래에 푹 빠진 생각없는 고딩처럼 보였지만 어느 정도의 위기감이 있었다. 명문대를 나온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없다는 이상한 의무감도 한 몫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한해 자진하여 공부를 했다.
단 1년이었지만 친구들은 H.O.T의 해체선언만큼 나의 공부선언에 경악했다. 지금으로 치면 JYP에서나 가능한 연습생 시스템을 혼자 구축하고 실행한 것이다. JYP에서는 연습생의 학교성적이 떨어지면 연습정지를 주고, 이후 개선되지 않으면 퇴출된다고 한다.
3번으로 찍고 자던 시절은 끝났다. 3학년 1학기 마지막 모의고사, 나는 꼴등에서 10등 안으로 드라마틱하게 진입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야자를 하면서 여름방학엔 문화부 장관배 힙합 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새벽에는 종종 옷장에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노래연습을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양손에 꽉 움켜쥔 채 꽉꽉 채운 1년이 흘렀다. 이 시기에 현재 가진 모든 병이 발현됐다. 만성비염, 목디스크, 아토피, 과민성대장증훈군. 몸이 항복할 때까지 몰아붙이는 불건강한 습관을 무기 삼아 성공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강박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