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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Oct 27. 2024

러브콜과 노예계약


힙합 트레인과 첫 자작곡

  수능이 대박 났다.

  벼락치기로는 한계가 있는 수학을 제외하고는 기적이었다. 수도권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자 그 길로 힙합 동아리를 찾아갔다. 심지어 학교를 고를 때 힙합동아리 정보를 알아보고 지원했다. 이제 나는 미성년자도 입시생도 아니었고 제약 없이 춤추고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꿈을 이룰 시간이 온 것이다.


  '힙합 트레인'이라는 이름의 동아리에 소속하여 많은 무대를 경험했다. 춤추고 노래하고 랩도 했다.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비트가 필요해지자 미디작곡을 시작했고, 인생 첫 자작곡을 썼다. 랩 메이킹, 탑라인 메이킹, 코러스 녹음까지 윈도우xp가 깔린 PC의 내장 사운드카드에 SM58과 게임용 헤드셋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경험이 쌓이고 실력이 늘어가는 선순환이었다.



알앤비소울의 노예

 당시 해외 팝시장은 '브리트니 스피어스'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 '저스틴 팀버레이크' 같은 팝 아이콘들이 이끄는 한편 '에미넴' , '제이지'를 필두로 힙합의 주류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보이즈투맨, 브라이언 맥나잇, 베이비 페이스'의 '컨템포러리 알앤비'가 저물고, 'TLC,데스트니스 차일드, 어셔, 알리야' 등의 대형 알앤비 스타들이 현란한 댄스와 함께 '어반 알앤비'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었다.


  대학 동아리 시절 무대 위에서 노래를 시작하면서 '어반 알앤비' 곡들도 많이 불렀지만 가장 즐겨 부른 곡은 'Killing Me Softley'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화 '시스터 액트 2'를 보고 반해있었던 '로린 힐'이 리메이크한 곡이었다. 그녀의 첫 솔로앨범인 'Miseducation Of Lauryn Hill'도 나의 음악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린 힐의 DNA를 잔뜩 물려받은 '알리샤키즈'가 등장했다. 듀렉을 쓰고 피아노를 치며 'Fallin'을 부르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나도 머리를 땋고 듀렉을 구해 쓰고 피아노를 치며 'Fallin'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음악적 정체성 속에 알앤비소울 장르가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러브콜

 늘 열렬히 응원해 주던 나의 대학 친구들은 내가 가요제 상금을 들고 와서 술을 쏠 때마다 '양민학살 그만하고 빨리 데뷔해' 라며 기분 좋은 핀잔을 줬다. 데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춤과 노래를 다 보여줄 수 있는 아길레라의 곡으로 가요제에 나간 날이었다. 마침 초대가수였던 그룹 B의 대표가 무대 뒤에 있었다. 그는 대상을 받고 앵콜무대중인 나를 발견했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나는 캐스팅을 당했다.


  몇 번의 진지한 미팅이 있었다. 그는 보아 같은 여자 솔로 가수를 만들고 싶어 했고, B그룹의 방송국 스케줄에까지 나를 동행시키며 믿음을 줬기에 계약이 코앞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미투감인 (본인은 농담이라고 뱉었을) 은은한 성적발언으로 인해 계약은 막판에 어그러졌다. 큰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 며칠은 좌절감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이후 어쩐 일인지 꼬리에 꼬리를 문 여러 개의 기회가 이어졌다. 이제 아름아름 연결된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어리고 자신감 넘쳤던 나는 작은 회사의 몇몇 대표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들의 러브콜을 덥석 받아들이기에 나는 너무 꿈이 컸다. 좀 더 좋은 회사에 가고 싶었다.


 휴학을 하고 노래를 정식으로 배워보기로 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실용음악학원이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검색하면 주부 노래 교습소 같은 것이 잔뜩 나왔다. 하지만 오랜 검색 끝에 기적이 일어났다. 당시 내가 손에 꼽게 존경하던 '한 뮤지션'이 강남에 보컬센터를 갓 오픈한 것이다. 그간 그녀의 음악적 행보는 유니크했고, 매력적이어서 나의 롤모델이자 이미 마음의 스승이었기에 주저 없이 달려갔다.


  그녀는 넘치는 아우라를 뿜으며 사무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내게 노래를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안경을 치켜올리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학원등록 같은 절차를 생각하고 찾아간 곳에서 난데없이 담배연기 가득한 오디션을 보게 되었지만 난 지체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알리샤 키즈의 'Fallin’을 무반주로 불렀다.


  노래를 마치자 그녀는 매우 뜨악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그리고 계약서를 내밀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너...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니..."



노예계약

  나중에 그녀에게 들은 설명에 의하면 나이답지 않은 호소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10년 20년은 더 지나야 나올법한 소울이 있었단다. 나의 롤모델이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계약서를 내미는 상황은 그 자체로 강력했다. 늘 인정욕구에 목말라있는 어린애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난 홀리듯 싸인했다.


  당시 저울질하던 몇 개의 회사를 팽개친 계약이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내가 꿈꾸던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훨씬 멋지고 유니크한 음악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회사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오로지 그녀의 존재로부터 생긴 신뢰를 바탕으로 한 무모한 계약이었다. 저렇게 멋진 그녀가 나를 원한다. 이건 해야 해.

 

 문제는 첫 앨범을 발매한 시점부터 계약기간이 카운트되는 얼토당토않은 계약조건이었다. 회사에서 앨범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허송세월을 보내기 딱 좋은 구조였다. 당시엔 우후죽순 생겨난 작은 회사들과 아티스트 간의 불리한 전속계약이 횡행했고 운이 따르지 않은 수많은 재능들이 젊음을 담보로 희생당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처음엔 그녀도 의욕적이었다. 몇 번의 그럴듯한 데모녹음과 프로필 촬영도 있었고, 유명가수의 녹음에 참여하여 피처링과 코러스를 할 기회도 생겼다. 탑라인과 랩메이킹 기회도 있었다. 페이를 받거나 저작권을 갖지는 못했다. 하지만 메이저 음악작업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로 나는 고무되어 있었다.


 그녀는 셀럽들과 함께 하는 사적인 자리에도 종종 나를 불렀다. 셀럽 무리에 섞여 오픈카를 타고 강남거리를 달리거나 시끄러운 클럽에서 잭콕을 마시는 것에 난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가 하자고 하는 건 뭐든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나는 방치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 장난감에 금세 질렸다.


  어떤 서포트도 케어도 기회도 없이 시간은 악랄하고 성실하게 흘렀다. 나는 혼자 연습하며 실력을 키웠고,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별 관심도 없는 국문과에서 성적 장학금을 받으며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할 일을 하며 버티면 곧 좋은 기회가 올 거라는 순진한 착각에 빠진 채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2년이 흘렀고,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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