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 시절엔 귀에 이어폰을 이식한 것처럼 하루종일 음악을 들었다. 이어폰을 꽂아야 능률이 오르는 편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아직 mp3 플레이어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전생같은 시절이라 CDP와 CD들을 챙겨서 들고 다니며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정말 순수하게 사랑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의 음악 취향은 엄청난 잡식이었다. 춤을 추면서 자연스럽게 접한 힙합,알앤비는 에너지 충만했던 나의 20대에 잘 어우려졌고 무대에 서기도 적합한 장르였다. 반주MR을 구운 CD 한장과 마이크 한 자루면 공연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 속 한켠에는 락스피릿이 흐르고 있었다. '너바나'와 '라디오헤드'의 초기 음악들을 뒤늦게 접하고 빠져들었다.
앞서 '락스피릿'이라고 표현했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얼터너티브한' 사운드를 선호했다. 당시는 뉴밀레니엄 시대에 걸맞게 기존의 것들을 뛰어넘고, 변형하고, 뒤집어 틀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하는것 자체가 문화예술 전반에서 유행이었다. 당연히 음악분야도 그러한 분위기가 번졌다.
밴드기반의 그런지와 모던록, 브릿팝의 시대를 지나 얼터너티브록, 포스트록이 등장했고 전자악기와 퍼스널 컴퓨터의 발전은 아트록, 앰비언트 등 전자음악과의 결합이 두드러진 새로운 사운드를 이끌었다. 나는 특유의 다크한 감성과 우울하고 염세적인 분위기에 빠져들었고 감각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는 평온함을 주었다. 이제껏 음악을 통해 접해온 것이 백의 세계였다면 이제 흑의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듯한 기분이었다.
'라디오헤드'의 'KID A'와 'Amnesiac'을 즐겨들었다. 내 마음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그때까지 홈즈의 나라정도로만 알고 있던 낯선 곳에 닿았고, 알고리즘의 추천 따윈 없던 시절이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어 '매시브 어택'에 닿았다. 'Tear Drop'의 시작을 알리는 심장박동 소리와도 같은 킥과 스네어가 울리기 시작하면 마음이 차분하게 울렁거렸다. 조용히 깔리는 노이즈와 페이드인 되는 오르간 리프, 묵직한 저음의 피아노 코드 플레잉 그리고 '엘리자베스 프레이지어'의 목소리가 뱉은 충격적인 첫 문장까지 모든 것이 까리했다.
'Love is a verb'
그렇게 트립합에 심취했다. 무대 위에서는 에너제틱한 힙합,알앤비를 불렀지만 평소에는 '라디오 헤드'와 '매시브 어택'을 듣게 되었다. 트립합의 덫에서 허우적 거리던 그 시절에는 '포티쉐드'의 '베스 기븐스'가 담배를 물고 무대에 등장해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커튼 처럼 내리고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서면, 노래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녀가 좋아지고 말았던 시절이었다. 말도 안되는 화질의 작은 영상을 거대한 컴퓨터로 보던 시절이었다.
그간 밴드 '자우림'의 음악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김윤아'의 음악은 달랐다.
그녀가 솔로 앨범을 냈다.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가 쓴 그녀의 곡들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 가닿았다. 그녀의 앨범 'Shadow of Your Smile'과 피아노 하나로 부른 '담'은 어린 내게 충격적이었다. '싱어송라이터' 만이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음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녀의 세계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 속에 블랙홀이라도 하나 생긴 것처럼 끝도 없이 깊은 어딘가가 소용돌이쳤다.
은유의 세계로 나를 초대한 그녀의 가사를 통해 시의 아름다움과 만났다. 앨범에 동봉된 160페이지에 달하는 수필집은 '베스기븐스의 무대 위 흡연'보다도 충격적이었다. 글을 쓰는 뮤지션이라니. 나의 미래를 엿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막연하게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좋아 국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던 나는 글쓰기와 음악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했고, 그녀는 그날로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에세이를 읽고 가사를 곱씹으며 음악을 넘어서 그녀의 삶 속에 스며있는 예술성 자체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뮤지션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만 한다고 결론 내렸다. 뮤지션을 넘어서 예술가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나의 목표임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막 무대위의 삶을 시작한 전투력 충만한 20대의 예술가는 포스트록이나 트립합을 하기 위해 기타를 사지도 않았고 '김나박이'가 이끌어가는 보컬전쟁에 참여할 생각도 없었다. 내게는 네오소울이 있었다.
알앤비 동네의 또 한 켠에서는 이미 네오소울의 씨앗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로린 힐'의 후예인 나는 자연스럽게 그 줄기를 따라 움직였다. 이미 90년대 중후반부터 '에리카 바두, 맥스웰, 디안젤로' 등이 뿌려놓은 씨앗은 2000년대와 함께 '알리샤 키스, 질 스캇, 뮤직소울차일드' 등의 걸출한 네오소울 아티스트에게로 이어지며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비욘세'보다 '에리카 바두'가 예술가라고 믿었다. 록이나 트립합은 나의 예술적 욕망을 채워주기에는 적합했지만 관중의 격앙된 반응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해보였고 나는 '네오소울'을 택했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관종적'인 이유였다.
계약 2년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어느날 나는 예대 입시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 가서 밴드를 만들고 네오소울 디바가 되리라. 회사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가 내 길을 닦지 뭐.
스믈넷의 겨울, 나는 대학을 옮기기로 결심했다.